올해 초 급속히 하락하다 한동안 크게 움직이지 않던 일본 엔화 가치가 다시 떨어지면서 달러-엔 환율이 20년 2개월 만에 최고 수준까지 올랐다. 달러-엔 환율이 오른다는 건 그만큼 엔화 가치가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등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기 위해 공격적인 금리인상 정책을 단행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만 이른바 ‘아베노믹스’로 부르는 양적완화와 제로금리 정책을 거둬들이지 않으면서 엔화 가치가 급락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 경제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수출 시장에서 일본과 맞서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엔화 약세로 인한 부담이 크다. 엔화 약세는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 향상, 일본 시장 내 한국 제품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 엔화 가치, 20년 2개월 만에 최저
7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달러-엔 환율은 달러당 133엔을 넘었다. 일본 NHK는 “달러-엔 환율이 2002년 4월 이후 20년 2개월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엔화 약세는 미국 경기가 예상보다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의 영향을 받았다. 미국 경기 침체 우려 약화, 인플레이션 압박 지속으로 미국 장기 금리가 상승하자 엔화를 팔아 달러화를 사려는 움직임이 강해졌다. 투자자들은 미국과 일본의 금리 격차가 벌어질수록 엔화 등 일본 자산을 보유할 이유가 사라진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120달러에 근접할 정도로 높아진 것도 엔화 가치 하락의 원인으로 꼽힌다. 한국처럼 에너지를 수입에 의존하는 일본에서는 유가가 높아질수록 해외에 지불해야 하는 달러 수요가 커지기 때문에 환율 상승의 요인이 된다.
20년 전 수준으로 엔화 가치가 떨어지는데도 일본 정부 및 당국은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자국 화폐 가치를 높이려면 글로벌 수준에 맞춰 기준금리를 인상해야 하지만, 올 1분기(1∼3월) 경제성장률이 ―0.2%일 정도로 경기 침체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섣불리 금리를 올리는 것은 무리라는 인식 때문이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중앙은행) 총재는 이날 국회에서 “강력한 금융완화 정책을 꾸준히 계속할 것”이라고 밝혀 외환시장에 미국 등과의 금리 격차 확대 우려를 불렀다. 전문가들은 과거에 비해 허약해진 일본 경제 체질을 감안하면 엔화 약세는 당분간 바뀌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 엔저 장기화 시 한국 수출에 타격
과거와 달리 엔저가 단기적으로는 한국 수출 기업에 큰 위협이 되진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반도체, 자동차 등 핵심 제조업 경쟁력이 일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다만 엔저가 하반기(7∼12월)까지 이어질 경우 경제 버팀목인 수출이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김진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본의 경기 침체가 계속되는 한 일본의 돈 풀기가 계속될 것이고 그에 따른 엔저도 지속될 것”이라며 “한국 수출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특히 일본과 수출 경합도가 높은 한국의 석유화학, 철강, 기계, 자동차 업종 가운데 중소기업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지속성장이니셔티브(SGI)는 최근 보고서에서 “엔저가 장기화하면 환율 감내 여력 및 환위험 관리 능력이 부족한 수출 중소기업 중심으로 피해가 예상된다”며 외환시장 변동에 대한 미세조정 및 시장안정화 대책을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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