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트와 소형 보트가 줄지어 정박해 있던 12일 오후 인천 영종도 왕산 마리나. 태블릿으로 목적지를 지정하자 선체 길이 9m의 아비커스 레저보트 한 대가 조타수 제어 없이 항해를 시작했다. 보트는 요트 한두 척이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만한 정박지의 좁은 바닷길을 승선 인원 8명과 함께 저속으로 빠져나왔다.
국립해양조사원에 따르면 이날 이곳의 선박운항지수는 운항 환경이 나쁘지 않은 편인 레벨2(낮을수록 양호). 선박운항지수는 파랑, 바람 등 운항 환경이 적당한지를 파악해 4단계로 구분해 발표된다. 자율운항 보트는 평소 뱃멀미가 심한 사람도 큰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잔잔한 바다를 순항했다. 자율운항은 풍속이 초속 10m 이하일 때 가능하다고 한다.
앞바다에서 본격적으로 속도를 낼 때쯤 전방 100m 이상 떨어진 거리에 소형 선박이 나타나자 보트는 자동으로 회피 운항했다. 보트에 달린 카메라와 라이다, 레이더로 인식한 시각 정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경로를 수정한 것이다. 카메라는 전방 500m까지 수면 위 물체를 인식할 수 있다. 아래 그물이 달린 1m 미만의 소형 부표도 놓치지 않았다.
경유지에 다다르자 최대 20노트(시속 37km)로 질주하던 보트는 선체를 한쪽으로 기울여 ‘유(U)턴’을 시도했다. 물보라가 일었지만 보트 안까지 침범하진 않을 정도로 안정적인 회전이었다. 도착지 인근에서 자율 접안 기능을 작동시키자 보트는 처음 출발할 때처럼 조타기를 알아서 미세하게 조정했다. 좌우 이동 기술까지 선보이며 내리기 적당한 위치에 보트가 멈추어 설 때까지 걸린 시간은 총 15분.
HD현대(현대중공업그룹 지주회사)의 자율운항 전문자회사 아비커스가 국내 최초로 레저보트 자율운항을 시연한 장면이다. 아비커스가 개발한 자율운항 레벨2 단계(선원 승선, 원격 제어)의 운항솔루션 ‘NAS 2.0’과 이·접안 자동 솔루션 ‘DAS 2.0’을 적용해 사람의 개입 없이 출항 및 운항, 접안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다.
아비커스는 선박 자율운항 시장을 주도하겠다는 현대중공업그룹의 비전 아래 2020년 12월 사내벤처 1호로 출범했다. 지금까진 주로 중·대형 선박의 자율운항 기술을 여러 번 실증하는 데 집중했다. 지난해 6월 총길이 10km의 경북 포항 운하에서 세계 최초로 12인승 크루즈선박으로 자율운항한 것에 이어 지난달 2일에는 SK해운과 18만 m³급 초대형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을 이 기술로 대양 횡단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날 시연에 쓰인 ‘NAS 2.0’은 대형 선박에 적용됐던 자율운항 기술을 레저보트용으로 전환한 솔루션이다. 비전센싱(인식)과 루트플래닝-자동내비(운항노선계획), 충돌회피 기능 등이 탑재돼 알아서 주변 환경을 인식해 운항 루트를 짜고 실제 운항까지 수행한다. 오늘날 자동차 운전자들에게 익숙한 운전보조시스템(ADAS)이 바닷길에도 적용된 셈이다.
아비커스는 해양 레저·스포츠 활동을 위해 보트나 요트를 구매하는 젊은 소유주가 늘고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임도형 아비커스 대표는 “한 해 고부가가치 선박은 수백 척 단위로 생산되는 데 반해 레저용 선박은 1000만 척이 넘어가는 큰 시장이다”며 “여유를 찾기 위해 보트나 요트를 구매하는 사람들 중 이런 자율운항 기술을 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 착안했다”고 말했다. 임 대표는 내년부터 이 레저보트용 자율운항 기술을 상용화하겠다는 구상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인 어큐트마켓리포츠에 따르면 자율운항선박과 관련 기자재 시장은 2028년 2357억 달러(약 280조 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중공업그룹 관계자는 “대형 선박에 적용되는 자율운항 기술인 ‘하이나스 2.0’은 하반기(7∼12월)부터 상용화할 계획”이라며 “NAS 2.0은 해양 레저 시장에도 솔루션을 제공하는 업체로 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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