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5일 경남 창원시 진북산업단지 내 ‘삼부정밀’ 공장. 한때 원자력발전 핵심 부품기업으로 꼽혔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날 삼부정밀 공장에는 원전 노즐 등 원전 부품 가공을 위한 기계 11대 중 7대가 멈춰서 있었다. 그나마 남은 4대도 원전과 관계없는 방위산업 제품 설비를 만드는 데 쓰이고 있었다. 이 회사는 4년 전 50억 원을 들여 공장을 확장 이전했다. 원전이 미래 에너지라는 확신에서 내린 결단이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2017년 80%였던 원전 매출 비중은 올해 2%도 안 될 정도다. 2대째 사업을 이어온 최재영 삼부정밀 이사(40)는 “일감이 없어 공장 가동을 못해 한 해 이자만 2억 원씩 나간다. 탈원전 정책이 닥칠 줄 알았다면 차라리 부동산에 투자할 걸 그랬다”며 한숨을 쉬었다.
#2. 2008년부터 원자로, 증기발생기 등 원전 핵심 부품을 생산해 온 경남 김해시 ‘세라정공’ 마당에는 녹슨 기기가 쌓여 있었다. 6년째 한 번도 못 쓴 치구(제품을 고정하는 기구)다. 올해 5월 신고리 6호기 마지막 부품 납품을 끝으로 원전 일감은 동났다. 2016년 40억 원대였던 매출은 지난해 12억 원으로 곤두박질쳤다. 설비 투자에 쓰려고 모아놨던 자금 70억 원은 5년간 부족한 공장 운영비를 메우는 데 모두 소진됐다.
윤석열 정부가 탈원전 정책 폐기를 공식화했지만 원전 산업 현장에서는 “산업이 여전히 존폐 기로에 서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일감 가뭄’을 해소해 줄 신한울 3, 4호기 건설 재개는 아직 1년 반가량 남았기 때문에 한계 상황에 몰린 원전 중소기업들이 이때까지 버티는 것도 무리라는 지적이다. 사실상 붕괴한 원전 산업 생태계를 되살리고, 유럽발 택소노미 훈풍과 차세대 원전 기술 경쟁에 발맞춰 국내 원전 공급망 기초체력을 높이지 않으면 ‘마지막 골든타임’ 기회마저 놓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 일감 없어 비원전 사업 이삭줍기와 대출로 연명
18일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원전 관련 중소기업의 기업당 매출액은 2016년 48억 원에서 2020년 29억 원으로, 직원 수는 평균 34.8명에서 16.5명으로 감소했다. 탈원전 5년간 일감이 끊기면서 전체 원전업계의 90%를 차지하는 원전 중소기업의 매출과 인력은 ‘반 토막’이 났다.
그 사이 국내 중소기업은 비원전 분야 일감을 이삭 줍듯 받아가며 ‘연명’해야 했다. ‘인터뱅크’는 한빛 1, 2호기 터빈 제어장치와 신고리 5, 6호기 제어봉 제어장치 등 정보기술(IT) 기자재를 공급해 왔지만, 최근엔 가끔 나오는 원전 유지 보수품 주문 외에는 원전과 관계없는 소재 관련 장비 등을 만들며 버티고 있다. 전체 매출의 5∼10%를 투자하던 연구개발(R&D)은 2016년이 마지막이었다. 문찬수 인터뱅크 대표(55)는 “원전 인력은 최소 5년간 숙련이 필요한데 일감이 끊기다 보니 숙련된 기술자를 찾기가 이제는 쉽지 않다”고 했다.
원전이 사양 산업이나 기피 산업으로 낙인찍히며 은행권에서 신규 대출, 만기 연장을 거절당하는 일도 잦았다. 발전소에서 장비와 연료 등을 옮기는 데 쓰이는 대형 원전 크레인을 제작하는 업체들은 결국 줄폐업했다. 매출 수백억 원대여도 업종을 전환하거나 공장을 경매에 내놓는 기업까지 나왔다.
○ 원전업계 “긴급수혈 넘어 미래투자 병행돼야”
최근에는 정부 지원 대책이 나오며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신한울 3, 4호기 설계 일감과 원전 예비품 등 1300억 원 긴급 일감을 발주하기로 했다. 중기부는 운영자금과 특례보증 등 1000억 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삼홍기계’는 핵융합발전소 핵심 부품인 열 차폐체 제작 기술력을 갖고 있는데도 원전 기업이란 이유로 은행권 대출이 막혀 애먹었던 곳이다. 김홍범 삼홍기계 대표는 “요새는 공공기관과 은행에서 먼저 연락이 온다. 다시 국가경제 중추로 인정받는 것 같아 눈물이 날 정도”라고 말했다.
원전업체 관계자는 “코로나19 방역으로 소상공인들이 손실을 본 것처럼 탈원전 정책으로 건실한 기업이 피해를 봤다”며 “과거 조선업 위기 때 산업위기대응특별지역을 지정해 기업회생을 도운 것처럼 원전업체가 투자할 때 30∼40%를 정부가 직접 지원해 주는 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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