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기차 비상등]
‘美 전기차 보조금 法’에 너무 달랐던 한-일 대응
日, 입법 前부터 美정계 직접 설득
韓, 뒤늦게 “美와 본격협상 나설 것”
미국 내 생산 차량에 대해서만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의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최근 발효되자 국내 자동차 업계와 관계 부처에 비상이 걸렸다.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25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반도체·자동차·배터리 업계 간담회’를 열고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이 장관은 “9월에 통상교섭본부장뿐만 아니라 저도 방미 계획이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될 것”이라며 적극 대응을 시사했다. 외교부도 법 집행에 유연성을 발휘해 달라는 메시지를 여러 경로를 통해 미국 측에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23일 미국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급히 미국으로 떠났다.
IRA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대응 방안을 강구하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유럽 자동차 회사와 유럽연합(EU)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난해 미국 제너럴모터스(GM)를 제치고 미국 자동차 판매 1위에 오른 일본 도요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일본 도요타가 강력한 ‘미국 정계 로비’를 통해 피해를 최소화했을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진입이 늦은 전기차 시장을 회복할 기회를 얻었다고 보고 있다.
IRA의 이전 버전이었던 조 바이든 행정부의 ‘더 나은 재건 법(Build Back Better·BBB)’에는 도요타에 치명적인 내용이 있었다. BBB 법안의 핵심 논쟁은 ‘Union Made Car(노조가 있는 기업이 만든 차)’에 약 4500달러의 세제 혜택(보조금 혜택)을 추가로 주겠다는 것이었다.
미국 공장에 노조가 있는 GM과 포드는 크게 환영했다. 반면 노조가 없는 도요타는 비상이 걸렸다. 미국에 이미 10여 개 공장이 있고, 전기차 시설을 늘리던 도요타는 투자를 하고도 불리해지는 상황에 몰릴 수 있었다.
일본을 비롯해 독일, 프랑스, 한국 등 각국 정부가 미국에 서한을 보내 항의하는 가운데 도요타는 정계를 직접 설득하는 발 빠른 ‘로비’ 공세를 펼쳤다. IRA에선 결국 이 내용이 제외됐다. 블룸버그는 “바이든이 지난해 말 무너진 BBB 법안에서 노조 인센티브를 주지 않기로 한 것은 도요타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승리”라고 평가했다.
日, 민관 뭉쳐 도요타에 불리한 조항 막아… 韓 뒤늦게 “美와 협의”
‘美 인플레法’ 늑장 대응
日, 기업-협회-정부 일사불란 대응… 도요타 공장 지역 의원에 집중 로비 불리했던 노조-판매량 조항 빠져 외교부 “손쓸 새도 없이 IRA 가결”… 이창양은 “우리 정부 대응 빨랐다” 업계 “정부, 대미접촉 지원 강화를”
산업계에선 미국 내에서 개별 기업뿐 아니라 협회, 정부까지 함께 움직이는 일본의 로비력이 자국 기업에 유리한 시장 환경을 만드는 데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평가가 많다. 정만기 자동차산업협회장은 “일본은 업체뿐 아니라 일본자동차협회들도 미국과 유럽에 사무실을 열고 로비를 할 정도로 체계적으로 움직인다”며 “우리 국회와 정부도 대미 아웃리치 활동(대외 접촉 지원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25일 블룸버그와 오픈 시크릿에 따르면 도요타는 지난해 미국 내 로비를 위해 33명의 로비스트를 고용해 약 620만 달러(약 83억 원)를 사용했다. 970만 달러(약 130억 원)를 쓴 GM에 이어 자동차 업계 두 번째 규모다.
도요타는 자사 공장이 있는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상원의원 조 맨친 의원을 적극 공략한 것으로 전해진다. 맨친 의원은 민주당 소속이지만 ‘더 나은 재건 법(BBB)’이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미 상원의원 구성이 공화당과 민주당 각각 50 대 50으로 나뉘어 있는 상황에서 맨친 의원의 반대는 영향력이 컸다. 도요타는 정치자금 후원 등을 포함해 공장 추가 투자 계획을 제시하면서 맨친 의원을 설득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맨친 의원은 BBB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축소 수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IRA의 뚜껑을 열어 보니 도요타에 불리한 ‘Union Made Car’ 관련 조항이 제외됐다.
미 정부는 또 그간 제조사가 친환경차 누적 판매량 20만 대를 달성하기 전까지만 보조금을 지급하던 것을 60만 대까지로 확대하려 했다. 친환경차 누적 판매 20만 대를 넘어선 도요타와 GM, 테슬라 등은 아예 이 규제를 없애 달라고 했다. 결국 IRA에서는 이 20만 대 수량 제한도 사라졌다.
업계에서는 IRA가 한국, 유럽 기업의 발목을 잡은 덕에 도요타가 시간을 벌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도요타는 전기차 전환 속도가 다른 업체들보다 느리다. 도요타의 첫 전용 전기차 bZ4X를 4월에야 미국 시장에 내놨지만 치명적 결함으로 리콜에 들어갔다. 월 평균 2000대 이상씩 파는 현대차, 기아와 달리 시장에 자리 잡지 못한 상태다. 일본 지지통신은 “미국, 유럽이나 한국 기업이 새로운 법에 대응하는 동안 생산과 조달의 미국 전환을 신속하게 달성할 수 있다면 일본 자동차업체들에는 반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도요타가 일부 피해를 보는 부분도 있다. 도요타는 아직 미국 내 생산 전기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가 없다. 하지만 도요타는 PHEV 시장에선 미국 내 경쟁자가 없을 정도인 데다 현대차와 달리 생산 공장 이전 및 신설 시 노조가 반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본은 시간을 벌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국내 자동차 업계가 IRA로 큰 차질이 생긴 것과 대조된다. 현대차는 최근 부사장급 임원이 이끄는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그러나 미국 내 전기차 생산 시점을 앞당기는 것 말고는 특별한 대책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 정부는 미 정부와 최대한 협의를 진행하고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도 고민하기로 했지만 대응이 너무 늦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외교부 관계자는 “손쓸 새도 없이 IRA가 이뤄졌다. 가장 중요한 조립 요건은 입법을 통해서만 수정 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방향으로 되게끔 노력을 차곡차곡 해나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날 업계 간담회를 연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정부의 늑장 대응 지적에 대해 “법 통과 이전부터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의견을 표시했다”며 “(유사한 상황에 처한) 유럽, 일본 등과 비교하면 우리 정부의 대응이 가장 빠르고 적극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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