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계열분리 시도… “1년 전부터 준비”
장형진 회장 측·최윤범 부회장 측 지분경쟁 불가피
최근 한화 유상증자 참여
폐배터리 사업 추가 협력·자사주 활용 방안 거론
장 회장 측 35% vs 최 부회장 측 25%… 외국인(19%) 캐스팅보트
글로벌 시황·실적·성장성 등 계열분리 적기 판단
1949년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 설립 이후 73년간 ‘한 지붕 두 가족’ 경영을 이어온 영풍그룹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영풍그룹 내 핵심 계열사인 고려아연이 한화그룹과 손잡고 지분경쟁을 위한 신호탄을 쏜 모양새다. 고려아연은 아연 제련 업계에서 압도적인 1등 기업으로 입지를 다지면서 그룹 내 핵심 계열사로 거듭났다. 그동안 업계에서 꾸준히 제기됐던 계열분리설이 현실화되는 수순에 돌입했다는 분석이다.
영풍그룹은 장병희 창업주 차남인 장형진 ㈜영풍 회장을 중심으로 장 씨 일가가 사실상 그룹을 지배하고 있다. 최기호 창업주 일가는 전 세계적인 배터리시장 성장에 따라 핵심 소재기업으로 급부상한 고려아연계열을 맡고 있다. 최기호 창업주 장남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의 차남인 최윤범 고려아연 부회장이 작년부터 대표이사로 회사를 이끌고 있다. ㈜영풍은 고려아연 최대주주다. 때문에 이번 고려아연의 계열분리 시도가 공동 창업주를 각각 대표하는 장 씨와 최 씨 일가의 힘겨루기로 보일 수 있다.
○ 고려아연, 우호 지분 확보 총력… “‘자사주 활용’ 카드까지 꺼냈다”
29일 재계에 따르면 최근 고려아연이 계열분리를 위해 지분 확보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업계에서는 한화그룹을 우군으로 확보했고 신규 사업을 명분으로 내세워 다른 전략적 파트너를 새로운 백기사로 영입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사주 활용 방안까지 거론되고 있다. 고려아연 자사주 지분율은 약 6.04%(신주 반영 추정치, 신주 발행 전 기준 6.34%)다. 자사주이기 때문에 의결권이 없지만 다른 업체에 지분을 넘기면 의결권이 생긴다. 자사주를 다른 기업에 넘기기 위해서는 이사회 의결을 거쳐야 하지만 고려아연 이사회는 최윤범 부회장에 우호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고려아연이 지분경쟁에 대비해 재무적 투자(FI)와 전략적 투자(SI)를 가리지 않고 우군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가운데 전략적 투자자로 LG그룹이 유력한 백기사 후보로 꼽힌다. 소재 뿐 아니라 폐배터리까지 배터리 관련 사업 전주기에서 긴밀한 협력 관계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윤범 고려아연 부회장은 올해 재활용(리사이클링) 사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선언했다. 그 일환으로 지난달 미국 전자제품 폐기물 재활용(리사이클링) 업체 이그니오홀딩스(Igneo Holdings)를 인수했다. 미국 자회사 페달포인트홀딩스(Pedalpoint Holdings)에 4360억 원을 출자했고 이를 활용해 이그니오홀딩스 지분 73%를 확보했다. 다음 달에는 더욱 큰 규모의 미국 기업 인수·합병(M&A)를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리사이클링 사업 관련 대규모 M&A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아연 측은 글로벌 폐기물 리사이클링 사업과 관련해 기업 인수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고려아연과 LG화학이 폐배터리 사업 협력을 위한 합작법인(JV) 설립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한국전구체주식회사 합작법인 설립과는 다른 프로젝트다. 이를 위해 경주지역에 대규모 공장 부지까지 마련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LG화학과 고려아연 측은 부인했다. LG화학 관계자는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일축했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경주 소재 철강 분진 리사이클링 계열사 징크옥사이드코퍼레이션이 순천 소재 리사이클링 업체(글로벌스틸더스트코리아, 지에스디케이, GSDK)를 인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규모 부지 매입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변했다.
업계에서는 고려아연과 LG화학이 모두 폐배터리 사업 협력에 대해 부인하고 있지만 두 업체의 긴밀한 관계와 사업적 연계성을 고려할 때 해당 사업 협력은 결국 시간문제인 것으로 보고 있다. LG가 한화에 이어 최윤범 체제 고려아연에 힘을 실어줄 백기사로 꼽히는 이유다. 이로 인해 고려아연 자사주 매각 대상으로 LG화학이 거론되기도 한다. 다만 자사주 매각 대상 업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 한화의 등장… “장·최 씨 일가 지분경쟁의 서막”
한화그룹은 이미 고려아연 백기사로 여겨지고 있다. 이달 초 고려아연은 이사회를 열고 한화그룹 계열 한화임팩트의 미국 투자 자회사 ‘한화H2에너지USA(한화H2)’로부터 4717억 원을 투자받는 안건을 승인했다. 한화H2는 고려아연 지분 5%(보통주 99만3158주)를 확보해 주요주주로 올라섰다. 지난 1년간 모은 주식까지 합치면 총 지분율은 약 6.55%(신주 반영 추정치, 신주 발행 전 기준 6.88%)까지 올라선다. 이번 투자는 최윤범 부회장과 김동관 한화솔루션 사장의 긴밀한 관계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특히 이번 신주 인수 과정에서 한화임팩트가 작년 4월부터 8월까지 고려아연 지분 1.88%를 사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한화임팩트가 NH투자증권과 신탁계약을 맺고 조금씩 지분을 매입했다고 한다. 한화임팩트는 한화에너지(지분 52.07%)와 한화솔루션(47.93%)이 보유한 업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장남인 김동관 한화솔루션 사장은 한화에너지 지분 50%를 갖고 있다. 때문에 이번 한화H2의 고려아연 지분 매입은 최 부회장과 친분이 있는 김동관 사장 의중이 반영됐다는 해석이다.
최윤범 고려아연 부회장해당 안건을 승인한 이사회에는 고려아연 기타비상무이사로 이사회 일원이면서 개인으로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한 장형진 ㈜영풍 회장만 유일하게 불참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 회장이 고려아연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은 건 최근 3년 동안 한 차례도 없었던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업계에서는 고려아연을 두고 장 씨와 최 씨 일가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사례로 보고 있다. 이번 이사회 전 고려아연이 계열사를 통해 LG화학과 합작법인(한국전구체주식회사) 설립을 추진할 당시에도 장 회장 측이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재계 관계자는 “이번 유상증자 과정에서 드러난 한화 측 지분 매입 시점과 규모 등을 보면 최 부회장이 고려아연 계열분리를 위해 1년 넘는 시간동안 준비해왔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며 “고려아연을 두고 장 씨와 최 씨 일가가 벌이는 지분경쟁의 서막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영풍 측 대응에 따라 지분 확보를 위한 전면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글로벌 아연 시장은 유럽 및 중국 전력난에 따른 수급 불안 등 고려아연 기업가치 제고에 유리한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고 최 부회장 측 역시 현 상황이 계열분리를 위한 적기로 판단하는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한화와는 신재생에너지와 소재 등 사업 분야에서 협력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화 측은 이번 지분경쟁 과정에서 회사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다. 백기사 가능성에 대해서 일축하면서 현재까지 진행된 재무적 투자에만 초점을 맞춰줄 것을 호소했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이번 투자는 전략적 사업제휴를 위해 유상증자에 참여한 것을 뿐”이라며 “고려아연 특정주주와 관계 형성을 위해 참여한 것은 전혀 아니고 지분경쟁 과정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규모나 수준도 아니다”라고 거리를 뒀다.
○ ‘캐스팅보트’ 쥔 외국인… 고려아연, 싱가포르서 해외 투자사와 회동
재계에 따르면 최 부회장은 지분경쟁에 대비한 우군 확보 일환으로 외국인 투자자 및 주요주주에도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글로벌 투자회사 B사와 S사, P사 등이 주요 외국인 투자자로 꼽힌다. 실제로 고려아연은 지난주 싱가포르에서 이들 투자회사 관계자들과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원만한 관계를 기반으로 지분 추가 매수 가능성이 점쳐진다.
지분경쟁 과정에서 외국인 투자자는 캐스팅보트(casting vote)를 쥐게 될 전망이다. 고려아연 전체 지분 중 외국인 비중은 약 19.05%(신주 반영 추정치, 신주 발행 전 기준 20%)로 규모가 꽤 크다.
고려아연 지배구조의 경우 ㈜영풍이 주식 518만6797주를 보유해 지분율 26.19%(추정치, 신주 발행 전 기준 27.49%)로 최대주주다. 장형진 회장 등 장 씨 일가가 보유한 주식은 약 8.57%(추정치, 신주 발행 전 기준 9%) 규모다. 이를 더하면 장 씨 일가에 우호적인 지분은 약 34.75%(추정치, 신주 발행 전 36.49%) 수준으로 추산할 수 있다.
반면 최윤범 부회장 등 최 씨 일가 지분은 약 12.38%(추정치, 신주 발행 전 기준 13%)다. 여기에 한화H2 지분 약 6.55%(추정치)를 합하면 최 씨 일가에 우호적인 지분은 약 18.93%(신주 발행 전 14.88%)로 추정된다. 자사주까지 포함하면 최 씨 일가 우호 지분 비율은 24.97%(신주 발행 전 21.22%) 수준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한화H2를 상대로 이뤄진 이번 유상증자를 통해 최 씨 일가 우호 지분은 확대됐고 장 씨 일가 지분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줄었다. 실제로 이사회를 장악한 최 부회장 측은 자사주를 우호 지분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경영권 분쟁이 본격화되면 장 씨 일가 지분 약 34.75%와 최 씨 일가 지분 약 24.97%가 맞붙게 되는 상황이다.
경영권을 가진 최 씨 일가 지분이 여전히 10%가량 열세다. 다른 지분의 경우 소액주주(기관 포함)가 약 12.93%(추정치, 신주 발행 전 13.58%), 국민연금은 약 8.3%(추정치, 8.71%)다. 소액주주는 다양한 성향이 혼재돼 있고 국민연금 지분은 의결권 행사 여부조차 현 상황에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때문에 외국인 지분(19.05% 추정) 향방이 장 씨와 최 씨 일가 지분경쟁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 최 씨 일가 등 고려아연이 백기사 영입과 함께 외국인 투자자 ‘모시기’에 공들이는 이유다. 내부적으로도 외국인 우호 지분 확보를 지분경쟁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도 현행 최 부회장 체제 고려아연의 기업 가치를 긍정적으로 볼 공산이 크다. 전력난으로 인해 유럽과 중국 내 아연 수급이 불안정한 상황이고 고려아연이 이에 따른 반사이익을 누릴 것이라는 전망이다.
장형진 영풍그룹 회장
○ ㈜영풍, 고려아연 지분 2~3% 매입 추진… 장내 매수 기타법인 관심↑
장 씨 일가의 경우 ㈜영풍은 공식적으로는 대응 계획이 없다며 말을 아끼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심스럽게 고려아연 지분 매입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재계 관계자는 “㈜영풍이 고려아연 측에 지분 2~3% 매입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영풍이 추진 중인 지분 확보 방식은 확인되지 않았다.
자체 현금을 활용한 주식 매입과 고려아연처럼 백기사를 활용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업계에서는 경영권 분쟁으로 비춰지는 것을 우려해 고려아연처럼 백기사를 활용해 우호 지분을 늘리는 방식으로 지분 매입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법인(기타법인)이 최근 꾸준히 고려아연 주식을 장내 매수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해당 법인이 어느 편에 우호적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 고려아연 계열분리 추진 배경… 최 씨 일가 명운 건 베팅
재계에 따르면 최 부회장을 중심으로 최 씨 일가가 현 시점에 고려아연 계열분리를 시도하는 이유는 그동안 지속적인 계열분리 요청에도 장 회장 등 ㈜영풍 측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시간만 흘렀기 때문이다. 또한 동일 업종인 석포제련소를 계열사로 두고 있는 ㈜영풍과 장 씨 일가가 과거와 달리 고려아연 경영에도 간섭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속되는 경영간섭이 계열분리 추진 결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시점의 경우 최 부회장이 발표한 리사이클링 사업 강화 등 3대 성장축을 바탕으로 기업가치가 커져 계열분리에 드는 비용이 늘어나기 전인 현재를 적기로 판단했다는 분석이다. 전력난에 의한 공급 이슈 등 글로벌 시장 상황도 고려아연 성장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최윤범 부회장과 최 씨 일가 입장에서는 대단히 큰 ‘베팅’을 시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며 “계열분리를 위해 꽤 오랜 시간 준비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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