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13년 5개월 만에 1370원대로 올라섰다. 환율 급등은 국내 증시에도 악재로 작용해 코스피는 한 달여 만에 장중 2,400 선이 붕괴됐다.
5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8.8원 오른(원화 가치는 내린) 1371.4원에 마감했다. 종가 기준으로 글로벌 금융위기였던 2009년 4월 1일(1379.5원) 이후 가장 높다. 이날 환율은 장중 1375.0원까지 치솟았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DXY)는 4일(현지 시간) 2002년 6월 19일(110.19) 이후 처음으로 110 선을 돌파했다.
최근 환율 오름세는 금융위기 때만큼 가파른 모습이다. 지난달 12일 1302.4원이었던 환율은 약 3주 만에 70원 가까이 상승했다. 외환당국은 이날 장 시작 전부터 구두 개입성 발언을 내보냈지만 환율 방어에 실패했다.
강달러에 원화값 올해 13% 하락… 외환보유 1년새 328억달러 줄어
환율 급등 1370원 넘어
달러화 대비 원화값 약세 두드러져… 주요 31개국 통화 중 낙폭 8번째 달러화 매도 ‘실탄 개입’ 효과못봐… 외환보유액 한달새 22억달러 감소 “대외부문 안정 최우선 정책 둬야”
원화 가치가 최근 큰 폭으로 하락한 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고강도 긴축 전망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달러화의 나 홀로 강세’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5일 유로-달러화 환율은 1유로당 0.9878달러로 2002년 이후 20년 만에 가장 낮았다. 영국 파운드화 가치도 37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고, 달러-엔 환율도 달러당 140.39엔으로 엔화 약세가 지속됐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원화는 대내외 악재가 겹치면서 약세 흐름이 더 두드러지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는 올해 들어 2일까지 12.75% 떨어져 주요 31개 통화 가운데 하락 폭이 8번째로 컸다. 대외 개방도가 높은 한국 경제가 최근 공급망 위기와 세계 경기 둔화 등 글로벌 경제의 악재에 유난히 취약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출이 둔화하고 에너지 수입이 급증하면서 무역수지는 다섯 달째 적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에만 94억7000만 달러 적자로 1956년 통계 작성 이래 최대 규모다.
한국은행은 최근 원화 약세 배경에 대해 “무역수지 적자가 지속된 데다 중국의 경기침체 우려와 지정학적 긴장 고조 등에 따라 위안화가 약세를 보인 영향”이라고 분석했다.
○ 구두 개입 안 통하고 실탄도 부족
환율 변동성이 급격히 커지자 경제·금융당국 수장들은 5일 한자리에 모여 긴급회의를 열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이날 오전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8월 들어 무역수지 악화, 위안화 약세 영향 등이 중첩되며 환율이 빠르게 상승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며 “시장 교란행위에 대해서는 적기에 엄정히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구두 개입성 발언에도 환율은 이날 장 시작과 동시에 연고점을 경신했다. 정부와 당국은 그간 수차례 구두 개입에 나섰지만 뚜렷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정부가 외환시장 미세조정(스무딩 오퍼레이션)에 나설 수 있는 ‘실탄’도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한은이 이날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8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은 4364억3000만 달러로 전달보다 21억8000만 달러 감소했다. 올 3월 이후 4개월 연속 감소하다가 7월에 반등에 성공했지만 다시 한 달 만에 쪼그라든 것이다. 당국이 환율 안정을 위해 달러화를 매도하는 실탄 개입을 반복한 결과 지난해 10월 4692억1000만 달러로 역대 최대였던 외환보유액은 그 후 1년도 안 돼 327억8000만 달러나 줄었다.
○ “대외건전성은 문제없다”지만…
원화 가치가 추락을 거듭하고 있지만 정부와 한은은 한국 경제 대외 신인도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다. 추 부총리는 “높아진 환율 수준과는 달리, 대외건전성 지표들은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최근 원화 절하 폭이 과도하다는 지적에 대해 “그 전에는 우리(원화)가 덜 떨어졌다. 어떤 기간을 통해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최근 환율 급등이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기보다는 글로벌 경제 상황으로 인해 불안심리가 이상 고조됐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환율의 지나친 급등을 좌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무역 적자가 쌓이면 원화 가치가 더 하락하게 되고, 환율이 더 오를 경우 물가를 끌어올려 실물 경제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무역 적자가 지속되는 한 환율은 더 올라갈 수밖에 없다”며 “지금은 정부가 경각심을 가지고 대외 부문 안정을 정책 최우선 순위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