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회사를 운영하는 60대 A 씨는 이달 초 시중은행을 찾아 3개월짜리 달러 정기예금에 400만 달러(약 55억4000만 원)를 넣었다. 달러로 운용하던 미국 주식과 채권 등 투자 상품을 모두 팔고 150만 달러를 추가로 사들여 달러예금에 가입한 것이다. A 씨는 “다들 경제위기라고 하니 안전자산인 달러를 쟁여두고 있다가 나중에 달러 값이 더 높아졌을 때 빼서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달러 가치가 20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으며 ‘킹(King) 달러’의 위세를 이어가자 달러 사재기에 나서는 투자자들이 늘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를 넘어 1500원까지 뚫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데다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면서 안전자산인 달러 선호도가 커진 것이다. 이 여파로 달러예금 금리가 원화예금보다 높은 이례적인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 “환율 1400원 넘는다”…달러예금 뭉칫돈
7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개인과 기업들이 은행에 넣어둔 달러예금 잔액은 7월 말 764억7000만 달러로 한 달 새 28억6000만 달러 늘었다. 이달 들어서도 시중은행에는 달러예금을 찾는 고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흥두 국민은행 도곡스타PB센터 팀장은 “최근 달러예금을 찾는 고객이 평소보다 6배 정도 늘었다”고 말했다.
원-달러 환율이 13년 만에 처음 1300원을 돌파한 6월 말만 해도 고점으로 생각하고 달러는 내다파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후 환율 상승세가 계속되자 달러 매수로 돌아섰다는 게 은행들의 설명이다. 김봉제 하나은행 CLUB1 PB센터 팀장은 “환율이 조만간 1400원대를 훨씬 넘어설 것으로 보고 달러를 대량 사들이는 큰손들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은퇴한 60대 B 씨도 지난달 25일부터 이틀간 600만 달러를 사들였다. B 씨는 “이날 한국은행이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렸지만 달러 강세가 더 심해질 거라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특히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지난달 말 잭슨홀 회의에서 강력한 긴축을 예고한 이후 달러 매수 흐름을 더 강해진 것으로 분석된다. 이 팀장은 “예전에는 고객들의 자산의 10% 정도를 달러에 투자했는데 최근 이 비중이 20%까지 늘었다”며 “경기 침체 시그널이 강해지다 보니 안전자산을 늘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 달러예금 금리가 원화예금 추월
달러 사재기에 나서는 투자자가 늘어나자 은행들도 달러예금 금리를 잇달아 올리며 고객 유치 경쟁에 나서고 있다. 이 때문에 달러 정기예금 금리가 원화예금 금리를 추월하는 역전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7일 현재 국민,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1년 만기 달러 정기예금 금리는 연 3.59~3.85%다. 원화 정기예금 금리(연 3.35~3.50%)보다 많게는 0.35%포인트 높다. 올해 초만 해도 달러예금 금리는 연 0.2% 안팎에 불과해 원화예금보다 1%포인트 이상 낮았다.
미국의 고강도 긴축과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등의 여파로 달러 초강세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지만 환율 변동성이 워낙 커 달러 신규 투자는 신중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미국이 강력한 긴축 의지를 내비친 만큼 원-달러 환율이 1450원까지 올라갈 수 있다”며 “다만 실수요 없이 환차익만을 보고 지금 원화를 달러로 바꿔 신규 투자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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