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K-기업이 사라진다]
2017∼2022년 글로벌 시총 1000대 기업 분석해보니
韓기업 5년새 25 →12개
지난 5년 동안 글로벌 1000대 기업(시가총액 기준)에 포함되는 한국 기업 수가 반 토막이 난 것으로 집계됐다. 또 이들 그룹에 새로 진입한 한국의 신생 기업은 사실상 한 곳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과 중국 등 주요국에선 이 기간 4차 산업혁명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는 동안 혁신 기업이 다수 쏟아지며 산업구조 재편이 빠르게 일어났다. 하지만 한국의 시총 선두그룹은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현대차 등 전통 제조기업들이 여전히 차지하고 있고 이들의 세계 시총 순위도 뒷걸음질친 것으로 조사됐다.
18일 동아일보가 NH투자증권에 의뢰해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세계지수(ACWI)에 편입된 47개국 증시의 시총 상위 기업들을 조사한 결과 한국은 1000위 안에 든 기업이 2017년 말 25곳에서 올해 8월 25일 기준 12곳으로 절반 이하로 줄었다. 5년 사이에 새로 1000대 기업에 진입한 한국 기업은 LG에너지솔루션과 기아, 삼성SDI, 카카오 등 4곳으로 카카오를 제외하면 모두 기존 대기업 계열사였으며 설립 10년이 안 된 새로운 기업은 하나도 없었다.
글로벌 100대 기업으로 좁히면 한국에선 대장주인 삼성전자가 유일하게 포함됐다. 하지만 순위는 31위로 2017년(15위)과 비교하면 16계단 떨어졌다.
삼성전자를 포함해 2017년과 올해 모두 1000대 기업에 이름을 올린 8곳 가운데 삼성바이오로직스(386위)를 제외한 7곳은 모두 순위가 하락했다. 또 5년 전 1000대 기업에 이름을 올렸다가 순위 밖으로 밀려난 기업들은 금융(KB금융 삼성생명 신한지주), 필수소비재(LG생활건강 아모레퍼시픽 KT&G), 에너지(SK이노베이션), 유틸리티(한국전력) 섹터 등에서 많았다.
반면 글로벌 시총 1000위 안에 든 중국 기업은 2017년 58곳에서 2022년 167곳으로 약 3배가 됐다. 미국은 중국의 초고속 성장과 거센 도전에도 점유율을 2017년 363곳에서 2022년 374곳으로 소폭 높였다.
이한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코로나19 이후 세계화가 후퇴하고 미중 간 경제 패권 다툼이 첨예해지면서 한국의 기업 환경은 더 악화됐다”며 “산업구조 변화와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자국 우선주의’에 혁신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韓, 최근 5년간 1000대 기업 진입 4곳뿐… 美는 ‘줌’ ‘우버’ 등 95곳
韓기업 4곳 중 3곳 대기업 계열사… 규제 등 영향 젊은 혁신기업 전무 5년전 10개 업종 25개사 올랐지만 올해는 에너지 등 4개 업종서 증발 韓금융, 관치 탓 순위 밀려날때 ‘블록’ 등 해외 핀테크사 급부상
“지금의 데이터 저장 시스템은 1980년대식이다. 우리는 데이터를 담는 창고(warehouse)를 완전히 다시 상상했다.”
2012년 미국의 데이터 분석 플랫폼 기업 스노플레이크를 설립한 티어리 크루안스는 자사의 창업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크루안스는 “이 결심을 한 뒤 공동창립자 브누아 다주빌과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프린터와 화이트보드 두 가지만 사서 다주빌의 아파트에 첫 사무실을 차렸다”고 했다. 이후 성장을 거듭한 스노플레이크는 2020년 글로벌 시가총액 183위에 올랐다. 전 세계 200대 기업이 되기까지 채 10년도 걸리지 않았다.
미국에선 스노플레이크처럼 5년 전에는 글로벌 시총 1000대 기업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올해 순위권에 든 기업이 95곳이나 된다. 잘 알려진 기업 중에서는 2011년 설립된 화상회의 서비스 기업 ‘줌’이 2020년에 149위로, 차량공유 업체 우버가 2019년에 284위로 각각 1000대 기업에 새로 입성했다. 이처럼 글로벌 기업으로 새롭게 부상한 기업은 최근 산업 구조 변화와 혁신 과정에서 생겨난, 설립된 지 20년도 되지 않은 곳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새로운 시류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규제의 올가미’에 묶여 있는 한국 기업들 사이에서는 혁신 신생 기업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 글로벌 혁신 기업 없는 한국… 4개 업종에선 증발
한국 기업들 중에선 신성(新星)을 찾기 힘들다. 지난 5년 사이 새로 1000대 기업에 진입한 한국 기업은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카카오, 기아 등 네 곳. 카카오가 벌써 12년 된 기업이고 나머지는 대기업 계열사임을 감안하면 혜성처럼 나타난 젊은 혁신기업은 없었다. 2017년 한국은 10개 업종에 25개 기업이 글로벌 1000대 기업에 포함됐지만 올해 8월에는 6개 업종 12개 기업으로 줄었다. 4개 업종에서는 글로벌 1000대 기업이 완전히 증발한 셈이다.
정보기술(IT) 업종에서도 지난 5년간 미국과 중국에선 거대 기업들이 급격히 늘었지만 한국은 제자리걸음을 이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1000대 기업 중 미국의 IT 기업은 2017년 52곳에서 올해 64곳으로 늘었다. 빅데이터 분석 플랫폼을 만드는 팔란티어,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몽고디비(DB) 등 신생 혁신기업들이 시총 1000대 기업에 합류했다.
2017년 2곳에 불과했던 중국 IT 기업도 태양광과 컴퓨터 기반 기술이 급성장하며 올해 11곳으로 늘었다. 글로벌 태양광 1위 기업인 론지가 2020년,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위협하는 샤오미가 2019년 1000대 기업에 편입됐다. 하지만 한국에선 5년간 IT 분야 1000대 기업 수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3곳으로 변함이 없었다. 주우진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IT 혁신 기업은 과학 발전을 바탕으로 하는데 이를 미국 대학들이 주도하고 있고, 중국도 막대한 투자금을 쏟고 있다”며 “한국도 대학의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관치, 규제에 발목… 취약한 사업 전략도 원인
금융 업종에서도 KB금융 등 기존 1000대 기업 3곳이 5년 사이 순위 밖으로 밀려났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고질적인 ‘관치 금융’과 ‘규제 리스크’가 금융 기업들의 성장을 가로막은 결과라고 풀이한다. 금융당국이 은행들의 이자마진과 배당을 줄이라고 압박하는 것이나, 각종 국정과제 참여와 과도한 사회 공헌을 권고하는 것은 대표적인 관치로 꼽힌다.
이처럼 한국 금융기업들이 관치와 규제에 묶인 사이 해외에선 핀테크 기업들이 급부상했다. 2009년 설립된 디지털 결제 서비스업체 ‘블록’은 소상공인을 위한 값싼 신용카드 결제 단말기를 개발하고 개인 간 송금 서비스를 출시하며 2018년 글로벌 1000대 기업 반열에 올랐다. 최순영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내 핀테크 기업은 해외 기업과 달리 내수 시장의 한계와 각종 규제 때문에 성장이 더디다”고 꼬집었다.
중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 등 기업들의 사업 전략 실패도 스스로의 발목을 잡았다. 중국에 ‘K뷰티’ 열풍을 몰고 온 LG생활건강과 아모레퍼시픽은 2017년 글로벌 시총 1000대 기업에 있었지만 각각 2021년, 2018년 자취를 감췄다. 주된 시장인 중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봉쇄로 차갑게 얼어붙자 이들 기업의 영업이익이 크게 낮아지고 주가에도 악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