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모델로 ‘인생 2막’ 도전하는 6070
전업주부하다, 은퇴한 뒤 “도전”… 홈쇼핑 선발대회엔 1000명 몰려
65세에 모델수업 나선 이성경씨… “내 안에 숨은 끼에 나도 놀랐다”
첫 시니어모델 67세 김칠두씨… 통신-식품회사 광고까지 맹활약
《시니어 모델의 활동 무대가 넓어지고 있다. 대세 스타들만 찍는다는 통신사 광고부터 식음료, 패션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 중이다. 노년기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제약’이 아니라 ‘매력’이 되고 있다.》
광고-패션 무대 누비는 ‘백발의 모델들’
“컷! 와, 바로 ‘인생샷’이 나오네요.”
자그마한 체구에 은빛 머리를 턱 끝까지 기른 모델 앞에서 감독과 스타일리스트가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스태프 사이에선 박수가 쏟아졌다. 카메라가 꺼지자 수줍게 웃는 입가엔 고운 주름이 번졌다. 메그 라이언을 닮은 물결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이성경 씨(65·여)는 새내기 ‘시니어 모델’이다. 그는 지난달 27일 경기 포천시에서 진행된 홈쇼핑 GS샵의 오디션 프로그램 ‘도전! 쇼퍼모델’에 참가했다. 쇼퍼모델은 일반인 고객들의 모델 도전 과정을 담은 6회분짜리 프로그램이다. 올해 쇼퍼모델에는 1000명에 달하는 GS샵 고객이 참가 신청을 했다. 이 중 서류와 면접을 통과한 최종 10명이 김성일 스타일리스트 등 전문가로부터 모델 기본기를 배우고 다양한 미션을 수행했다. 이 씨는 지난달 27일 마지막 화보 촬영 미션에서 1등을 차지했다.
전업주부로 살다 50대 후반부터 베이비시터 일을 시작한 이 씨는 모델과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다. 옷 입는 걸 좋아하고 뭘 입어도 맵시가 난다는 말은 종종 들었지만 ‘에이, 내가 뭘’ 하며 손사래 쳐왔을 뿐이다.
7년 전 주 5회로 시작한 베이비시터 일이 최근 주 2회로 줄고, 나이를 먹으며 ‘내 일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커지는 찰나였다. 평소 보던 홈쇼핑 프로그램에서 일반인 모델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성경 씨가 하면 참 잘할 것 같아”라는 주변 지인들의 적극적인 추천에 힘입어 출전을 결심했다. 그 결심이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 나이가 ‘제약’이 아니라 ‘매력’이 되는 세계
프로 모델이 아닌 이 씨가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처음부터 쉬웠을 리 없다. 초심자라면 누구나 겪는다는 ‘카메라 울렁증’을 이 씨 역시 비켜갈 수 없었다. 카메라 앞에만 서면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자신감도 사라졌다. 손짓 발짓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마지막 화보 촬영 미션을 앞두고 초조하게 대기하던 이 씨의 귓가에 뜻밖에도 어릴 적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스쳤다.
“얘는 어릴 때 거울 앞에서 얼마나 여우짓을 떨었는지 몰라. 하루 종일 거울 앞에서 옷 갈아입으면서 놀았다니까.’
‘그래, 엄마 앞에서 재롱 피우던 다섯 살 이성경으로 돌아가는 거야. 사람들 의식하지 말고 엄마 앞에서 놀듯이 놀자.’ 그렇게 무아지경이 된 채 1분, 2분 시간이 흘렀다. 스타일리스트가 “인생컷 나왔다”고 외쳤다. 다른 사람들은 10분씩 걸린 촬영을 이 씨는 2분 만에 끝내버렸다. 이 씨는 “내 안에 이런 끼가 숨어 있었다니 나도 놀랐다”며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다는 걸 또 한번 느낀 순간”이라고 말했다.
이 씨는 이제 새로운 꿈을 꾼다. 홈쇼핑 모델도 하고 싶고 화보 모델도 하고 싶다.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 한강에 나가 1시간씩 걷기 운동과 워킹 연습을 한다. PT(Personal Training·개인레슨) 학원도 알아보고 있다. 꿈이 생겨 차근차근 공부해나가는 요즘 하루하루가 기쁘다.
그는 “지금 내 나이가 제일 좋다”고 말한다. 따로 염색도 하지 않는다. 은발은 은발대로 멋이 있기 때문이다. 까만 베레모도 흰머리 위에 쓰면 신선한 매력을 준다. 시니어 모델은 변화를 당당하게 수용하고 나이든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곧 일이다. 웬만한 직업은 나이가 ‘제약’이지만 시니어 모델은 나이가 ‘매력’인 셈이다.
○ 패션·뷰티업계 존재감 높아진 시니어 모델
최근 시니어 모델의 활동 무대도 넓어지고 있다. 더 이상 보청기, 온열매트, 성인용 기저귀 등 노인의 전유물만 광고하지 않는다. 2018년 헤라서울패션위크로 데뷔해 ‘국내 최초 시니어 모델’ 타이틀을 가진 김칠두 씨(67)는 KT(통신사), 던킨도너츠(식음료), 이랜드 폴더(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메인 얼굴’을 맡아 활약 중이다.
국내 처음으로 4년제 모델과를 개설한 동덕여대는 올해 4월 평생교육원 산하에 ‘시니어 모델’ 과정을 열었다. 30여 년간 학원을 운영한 원장님, 대학 총장님, 부부, 은퇴한 교감 선생님, 주부 등 4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이력을 가진 중장년이 모델 수업을 받는다.
김동수 동덕여대 모델과 교수(한국모델콘텐츠학회장)는 “외국에선 50년 전부터 현역 원로 모델이 패션쇼에 섰다”며 “사회가 선진화될수록 모델의 연령, 체형, 성별도 다양해진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1세대 해외파 모델이기도 한 김 교수는 “30∼40년 전 외국에서 처음 모델 활동을 시작할 당시에도 오버사이즈 모델, 프티사이즈 모델 등 다양한 사람이 무대에 섰다”고 덧붙였다.
세계적인 패션업체는 일찌감치 모델에 대한 개념을 바꿔왔다. 샤넬, 펜디, 알렉산더 매퀸 등 유수의 명품 브랜드들이 오버사이즈 모델을 패션쇼에 세운다. 뼈가 길고 깡마른 사람만 아름다움의 대상이 됐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나이, 사이즈, 성별, 젠더 불문하고 아름다움의 대상이 되는 셈이다.
‘도전! 쇼퍼모델’을 연출한 이명재 GS샵 PD는 “패션·뷰티업계에서 실제로 옷을 소비할 소비자와 비슷한 연령대, 사이즈의 모델에게서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크다”며 “일반인 모델, 시니어 모델에 대한 조명은 실제 수요를 반영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 초고령사회 진입하며 욜드족 부각
시니어 모델은 동년배 소비자가 옷을 고를 때 이상과 현실의 절충안으로서 좋은 ‘쇼핑 아바타’가 된다. 김 교수에 따르면 ‘(시니어 모델은) 저 사람이 했으니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다는 것. 그런가 하면 자기관리 잘된 몸과 ‘늙으면서 늙어지지 않는’ 모습은 동년배 소비자에게 본인의 미를 계속 가꿔나가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일종의 롤모델인 셈이다.
실제 소비자 반응도 좋다. 20일 기준 3화까지 방영된 ‘도전! 쇼퍼모델’ 시청 가구 수는 1만8000가구로, GS샵의 일반 판매방송 평균보다 2배 많다. GS샵 앱에서 진행된 본방사수 이벤트에는 1만8315명이 알람을 신청했고 1만5484명이 응원의 댓글을 남겼다.
특히 주 소비자층이 고령화하고 있는 홈쇼핑업계 등이 시니어 모델 기용에 적극적이다. 국내에서 첫 TV 홈쇼핑 방송이 시작된 1995년 당시 30대였던 고객은 이제 60대를 바라보고 있다. 이들에겐 유난희(1965년생), 이진아(1971년생) 쇼핑호스트 등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이들이 모델을 하는 게 ‘먹힌다’. 원로 쇼핑호스트들이 이들의 아바타이자 롤모델로 여전히 톱을 달리고 있는 이유다.
여기에 은퇴 후에도 넉넉한 자산을 바탕으로 활발한 소비생활을 즐기는 신중년, 이른바 ‘욜드(yold·young old)족’의 등장은 시니어 모델에 대한 수요를 증폭시키고 있다. 이들은 기존 시니어 대비 높은 경제력을 기반으로 여가와 소비 활동에 지출을 아끼지 않는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65세 이상 인구는 900만 명을 넘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불과 3년 뒤인 2025년에는 고령인구가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를 넘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 MZ 롤모델로
시니어 모델은 동년배에게만 어필하는 게 아니다. 젊은층에게도 지속적인 자극을 준다. 미국의 건강·뷰티 매거진 ‘뉴유(New You)’는 이달 홈페이지에 91세 현역 최고령 모델 카르멘 델로레피체의 인터뷰와 화보 사진을 공개했다. 여러 사진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끈 건 델로레피체의 과감한 누드 화보. 사진 속 그는 새하얀 이불로 상체를 가린 채 다리를 쭉 뻗고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는 15세 때 최연소 모델로 보그 표지를 장식하고 81세 때 최고령 모델로 기네스북에 오른 뒤 현역 최고령 모델 기록을 해마다 갈아 치우고 있다. 함께 화보 촬영을 진행한 모델 베벌리 존슨은 “나는 카르멘을 가장 존경한다. 그녀는 패션계의 모든 모델 중 가장 존재감이 크고 놀라운 작품을 보여 왔다”고 극찬했다.
‘도전! 쇼퍼모델’에 참가한 박경진 씨(60·여)는 올해 3월 39년간의 대한항공 승무원 생활을 마치고 시니어 모델로 인생 2막을 열고 있다. 그는 수석 사무장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승무원이다. 팔로어가 4000명 이상인 박 씨는 최근 자신의 인스타그램 소개란에 ‘#승무원 출신 시니어 모델’이라는 해시태그를 추가하고 모델 도전 과정이 담긴 사진을 올리고 있다. 그의 새로운 도전은 후배 승무원들에게도 귀감이 된다. 그의 인스타그램엔 ‘1막 인생은 승무원으로, 2막 인생은 모델로 승승장구’ ‘대단하다’는 후배들의 응원이 가득하다. 박 씨는 “60대가 된 나이에도 끊임없이 도전하는 모습으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70세 패션 유튜버 ‘밀라논나’ 장명숙 씨는 구독자가 94만4000명에 달한다. 20, 30대 팬들이 ‘논나(밀라논나의 애칭)처럼 살아가고 싶다’ ‘기품 있는 논나를 닮아가고 싶다’고 댓글을 단다.
2030 여성이 주로 사용하는 패션앱 ‘지그재그’는 원로 배우 윤여정을 모델로 발탁해 큰 화제를 모았다. 오픈서베이가 ‘MZ세대 패션앱 트렌드 리포트 2021’에서 15∼39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4.0%가 “지그재그의 윤여정 모델 발탁은 앱의 이미지 변화 및 구입 의향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답했다. 배우 유아인을 모델로 한 무신사(52.0%), 김태리를 앞세운 에이블리(57.0%)보다 높은 수치다.
시니어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최근엔 흰머리 자체가 하나의 스타일이 됐다. 인스타그램에 흰머리를 의미하는 ‘실버헤어’ ‘그레이헤어’ 해시태그를 단 포스팅은 각각 271만 개, 105만 개에 이른다. 시니어라서 오히려 더 힙한 패션 아이콘이 될 수 있는 시대가 된 셈이다. 이정교 경희대 미디어학과 교수(한국광고학회 기획이사)는 “사람들은 롤모델로 삼고 싶고, 동일시하고 싶은 대상에게 열광하기 마련”이라며 “최근 시니어들 가운데 윤여정, 오영수(오징어게임) 등 세계적인 무대에서 활약하는 캐릭터들이 나타난 게 시니어 모델이 각광받는 중요한 배경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2008∼2015년 국내 잡지 광고에서 시니어가 등장한 광고는 전체 광고 수의 10.5%에 불과했다. 그동안 광고 속 시니어는 실제 노년층 인구에 비해 적게 나온 셈이다. 그만큼 시니어 모델 시장의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시니어 모델은 젊은 셀럽 위주의 비슷비슷한 ‘광고 노이즈’ 속에서 특별하게 돋보이는 효과를 낸다”며 “기업과 브랜드 차별화를 위해 시니어에 초점을 맞추는 광고주와 마케터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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