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량 공기관-카드사도 ‘돈줄’ 말랐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27일 03시 00분


[자금시장 경색 확산]
‘50조 대책’에도 자금 경색 확산… 한전-인천공항公 채권 유찰 이어
신용등급 ‘AA0’ 현대카드 회사채… 1000억 모집에 응찰 800억 그쳐

최근 정부가 내놓은 ‘50조 원+α(알파)’ 규모의 유동성 공급 대책에도 단기 자금시장 가뭄은 좀처럼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최고 신용등급의 공공기관 회사채는 물론 인기몰이를 했던 대형 카드사의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채권까지 모집 물량을 채우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채권시장 경색으로 금융회사들도 부동산 관련 대출을 잇달아 중단하면서 기업뿐 아니라 대출 실수요자들의 타격마저 우려되고 있다. 기업들의 자금난이 커지자 전날 정부가 국고채 발행을 축소하기로 한 데 이어 시중은행들도 은행채 발행 최소화에 합의하는 등 시장 안정화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26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신용등급 ‘AA0’인 현대카드는 27일 1000억 원 규모의 여신전문금융회사채(여전채) 발행을 앞두고 25일 수요예측을 진행했지만 모집 물량은 800억 원에 그쳤다. 현대자동차그룹 계열로 우수한 영업 기반을 가진 현대카드마저 물량을 채우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안정성을 자랑하던 공사채들도 최근 줄줄이 채권 모집에서 물량을 채우지 못하는 굴욕을 겪고 있다. 25일 최고 신용등급인 한국전력공사의 AAA급 한전채는 4000억 원 입찰에서 2000억 원이 유찰됐다. 2년물에만 자금이 몰리면서 3년물 자금 모집에 실패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AAA급인 인천국제공항공사 역시 3년물이 목표 금액을 채우지 못했고, 한국가스공사와 인천도시공사도 모집 물량이 미달됐다. IB 업계 관계자는 “투자자들이 단기물에 관심을 두는 것은 장기 채권은 만기를 오래 기다려야 하는 리스크가 있기 때문”이라며 “해당 기업의 미래가 그만큼 불안하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한국공항공사의 채권은 26일 AAA급 공사채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6%가 넘는 금리에 낙찰됐다.

장기물 발행에 실패한 회사들은 자금 조달이 급한 나머지 단기자금 시장으로 향하고 있다. 이로 인해 대표적 단기 채권인 기업어음(CP) 금리가 치솟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26일 기준 91일물 CP 금리는 4.51%로 2009년 1월 19일(4.64%) 이후 최고치다.

공사채 금리 금융위기후 첫 6%대… ‘돈 흡수’ 은행채 발행 줄인다


‘50조 대책’에도 돈가뭄
‘PF 부실’ 중소 증권사들 자금난 비상… 금융당국, 3조 유동성 지원 돌입
대형 증권사는 ‘제2 채안펀드’ 논의… 춘천, 보증금리 13%로 급등



시장은 지금까지 정부가 내놓은 대책만으론 단기자금 시장이 안정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금융당국의 대책은 어디서 새로운 재원을 마련한 게 아니라 기존 금융사의 출자로 이뤄진 것이라 사실상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격’”이라며 “채권시장안정펀드도 회사채 차환 물량의 최대 50%까지만 지원하고, 나머지 50%는 기업이 시장에서 구해 와야 해서 효과가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추가 대책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분위기다. 발권력을 이용해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는 한국은행은 고물가에 발목을 잡혀 있어 본격적인 자금 지원을 하기 힘들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최근 국정감사에서 우량 회사채를 담보로 금융사에 돈을 빌려주는 금융안정특별대출 등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 고수익 부동산 금융, ‘대형 부실’ 부메랑으로
급한 쪽은 최근 수년간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대규모로 투자해온 중소형 증권사들이다. 수수료 인하 경쟁을 통한 개인고객 유치에 한계를 느낀 증권사들은 경기 호황기를 틈타 부동산 개발사업에 자금을 대주고 이를 기반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는 PF 사업에 열중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고금리·고물가로 시장이 침체되고 공사비가 늘어나면서 PF 사업은 오히려 대형 부실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한국신용평가의 올 3월 말 기준 집계에 따르면 24개 국내 증권사의 부동산금융 위험액(익스포저)은 총 45조 원가량. 자기자본 대비 부동산 개발 사업 위험액은 증권사 평균 39% 수준이지만 소형사는 49%로 절반에 육박한다. 소매 부문의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 비교적 공격적으로 PF 사업을 벌여온 탓이다. 앞으로 국내 증권사들이 신용보강 또는 매입보장을 해준 PF는 매달 10조 원 안팎씩 만기가 돌아온다. 만일 만기 때 PF 자산유동화증권을 차환 발행하지 못하면 이는 고스란히 증권사들이 떠안아야 하고 여력이 되지 않는 증권사들은 디폴트(채무 불이행)에 빠질 공산이 크다.


이에 금융당국은 26일 PF 만기 연장에 어려움을 겪는 증권사를 위해 이번 ‘50조 대책’에 포함된 3조 원의 유동성 지원에 돌입했다. 또 당국과 5개 시중은행은 이날 긴급회의를 열고 은행권의 은행채 발행을 최소화하기로 합의했다. 그동안 은행들은 현금성 자산을 늘려야 하는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규제에 대응하느라 신용등급이 높은 은행채를 대량 발행하면서 시중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아울러 은행들은 기업어음(CP) 매입 등을 통해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KDB산업은행은 2조 원을 증권사 CP 매입에 투입하기로 했다.


이날 금융투자협회는 9개 대형 증권사 임원들을 소집해 ‘제2의 채안펀드’ 조성 등 중소형 증권사에 대한 구제 방안도 논의했다. 다만 부동산 호황기에 역대 최대 이익을 낸 증권사들을 지금 와서 지원하는 것은 도덕적 해이를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중소형사의 채권을 떠안아 손실을 감수하는 것이 배임 행위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있다.
○ 레고랜드 사태, 지방자치단체 신용에도 타격
레고랜드발 자금시장 경색은 기초자치단체에도 타격을 주고 있다. 최근 자금시장 경색은 춘천 레고랜드 사업 주체인 강원도가 당초 약속한 PF 유동화증권의 지급 보증을 거부하면서 촉발됐다.

강원 춘천시에 따르면 이날 춘천시는 동춘천산업단지 개발과 관련된 보증 채무 162억 원의 상환기일을 3개월 연장하면서 기존 연 5.6%에서 연 13%로 오른 금리를 적용하기로 했다. 기존에는 3개월 이자가 2억2680만 원이지만 새 금리를 적용하면 5억2650만 원으로 약 3억 원 늘어난다. 채권자 측은 처음에는 자금시장 경색과 지자체의 신뢰도 하락 등을 이유로 상환 기일 연장 불가와 함께 전액 상환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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