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주말에 친구들과 어울릴 장소는 분명했습니다. 바로 강남역과 신사역. 다양한 패션 브랜드와 먹거리가 즐비하며 수많은 인파가 주는 ‘흥’은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죠. 지금은 어떨까요?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을 넘어설 동네가 없습니다. 이태원도 꾸준히 강세지만 주류 문화가 깊게 자리해 전 연령층을 흡수하긴 어렵죠. 그래서 궁금해진 성수동을 대낮에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남과 북 사이에 낀 행운아
“성수동은 패션업계가 가장 주목하는 브랜드가 대거 자리해 최신 트렌드를 파악하는 최적의 장소로 꼽힙니다. 특색 있는 F&B 브랜드도 많아 네트워크 형성에도 도움이 됩니다.”
무신사 커뮤케이션실 PR팀 주성호
기자의 첫 번째 목적지는 에스팩토리. 스웨덴 보드카 앱솔루트에서 국내 최초로 팝업스토어(7월 7일~31일)를 열었거든요. 100% 사적인 산책은 아니지만 주말 오후에 한가로이 방문하는 기분으로 찾아갔습니다. 동네 분위기도 느낄 겸 조금 돌아가려고 4번 출구로 나오니 쎈느 서울의 모습이 보입니다. 2년 전 썸녀와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곳이었죠.
쎈느 서울은 인증샷 명소인 만큼 다채로운 이벤트가 열리는 곳이잖아요. 헤이딜러(중고차 플랫폼)와 캐논코리아도 지난달 이곳에서 ‘내차사진관’이라는 행사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멋스러운 올드카와 사진을 찍어 소장하는 이벤트로 화제였죠. 문득 ‘왜 하필 성수동에서 이벤트를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헤이딜러에 물어보니 예상외 답변이 돌아오더군요. “들어오고 나가기 편한 곳을 찾다 보니 이곳(성수동) 이었다.” 솔직하고 신선했습니다. 성수동은 다리 하나만 건너면 강남으로 갈 수 있습니다. 동부간선도로와 강변북로도 있어 서울 어디든 가기도 편하고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과거 성수동은 오래된 주택과 공장, 빌라촌이 밀집된 동네였습니다. 2000년 대, 성수동은 건국대학교 옆 동네였을 뿐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었죠. 급변한 건 약 10년 전 일입니다. 그것도 연예인의 재테크로 말이죠. 2014년 배우 원빈은 성수동의 한 상가주택(지하 2층, 지상 4층)을 21억 원에 매입합니다. 다음 해, 배우 권상우 역시 지상 2층 규모의 대지면적 946㎡의 공장 건물을 80억 원에 사들였죠. 성수동 곳곳에서 도시환경 재정비 사업이 진행됐기 때문입니다. 현재 성수동 일대는 서울시에서 강남구를 제외하고 몸값 높은 도시로 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18일, 코카콜라는 성수동 피치스 도원에서 제로 마시멜로 출시를 기념해 하우스 파티 콘셉트 체험존을 한시적으로 운영했습니다. 글로벌 브랜드는 성수동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해당 브랜드 매니저는 “행사를 위해 성수동으로 출근한다고 하니 부모님이 ‘공장 동네에 무슨 볼일이 있냐’라며 물으시더군요(웃음). 2015년을 기점으로 소위 힙한 이들이 성수동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레 그들과 같은 ‘필’을 얻고자 하는 인파가 몰리며 마지막으로 브랜드가 들어선 것” 같다는 의견을 내비쳤습니다. 브랜드가 사람을 모은 게 아닌 사람이 모여 브랜드가 된 도시. 흥미가 생겨 좀 더 걷기로 했습니다. 배우 김영철처럼.
에스팩토리가 시야에 들어오기 전부터 인싸의 기운이 느껴지더군요. 화려한 색감과 휘황찬란한 빛으로 꾸며진 팝업스토어. 평일 오후였음에도 입장까지 10분이 넘게 걸렸습니다. 인상 깊었던 점은 20대부터 40대까지 포진한 방문객의 연령대. 이태원과 신사동과는 다른 기분입니다.
체크인을 마치고 입장합니다. 브랜드 헤리티지를 설명하는 곳부터 아티스트와 함께 한 작품을 배경으로 한 공간까지 인생샷 남기기 딱이더라고요. 두 눈을 사로잡는 무드등 인테리어와 칵테일 제조 체험존도 자리해 즐겁기도 했고요. 그런데 성수동이 아닌 다른 곳에선 어려웠을까요? 이런 이벤트는 충정로(회사) 근처에서도 가능해 보입니다.
앱솔루트 브랜드 담당자는 다양성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Born to mix’라는 새로운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주 타깃인 MZ 세대에게 버라이어티한 모습을 전하고자 했던 거죠. 그래서 MZ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성수동이 낙점된 거고요.
한 홍보대행사 본부장에게도 ‘왜, 성수죠?’며 물어봤습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네요. 강남과 이태원 일대는 로직화된 프랜차이즈 분위기라 한정된 연령만 찾아가죠. 성수동은 낯설지만 세련된 기분을 선사해 시티 트래블러(방문자)가 트렌드세터가 된 기분을 줍니다.” 수긍이 가는 동시에 다른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잠실은요?’
의미로 쌓아올린 문화 동네
“성수동이 강남처럼 비싸지고 주차장도 부족해 브랜드 론칭 및 행사 이벤트엔 큰 메리트는 없다고 봐요. 다만 고층 빌딩이 없고 옛 공장과 가정집이 많아 컨셉츄얼하게 꾸미기엔 좋죠. 자동차 없이 오는 대중도 많아 조금만 몰려도 핫 플레이스처럼 보이죠.”
매그피알 PR 매니저 장은실
“롯데가 송파구를 발전시켰지만 반대로 다른 브랜드가 성장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봐요. 도시가 흥하려면 좋은 브랜드가 꾸준히 그곳에서 노출돼야 합니다. 되레 용산역 드래곤힐스파 부근이 서서히 뜨고 있어요. 넓진 않지만 해당 카페 거리를 중심으로 브랜드 행사가 늘고 있죠.” 브랜드 팝업 스토어가 열린다는 건 기업이 눈독 들인다는 해석입니다.
동시에 물리적인 영역을 벗어나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으로 진화합니다. 김지연 예술평론가는 지도 위의 존재하는 공간에 가치관·경험·시간이 입혀지면 맥락을 형성하고 비로소 의미가 부연된 장소로 변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2010년대부터 힙플레이스로 주목받은 해방촌, 연남동, 성수동 그리고 최근 을지로까지. 모든 곳은 처음에 관심에 목마르던 ‘공간’이었죠. 권력과 자본을 피해 새로운 터전을 물색하던 이들이 여기에 새로운 가치관을 더하고 경험을 쌓아올리면서 ‘장소’가 됐습니다.
이면과 매력이 레이어드 된 성수동. 걷다 보면 무료할 틈이 없습니다. ‘조화’보다는 ‘不조화’를 마주하게 되는데 통일되지 않은 풍경에서 규칙보다는 자유로움이 물씬 풍겨 발견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측정 불가한 감성
성수이로에 닿으면 붉은 벽돌 건물이 눈에 띕니다. 아더 스페이스 2.0 플래그십 스토어입니다. 겉보기엔 특색 없지만 건물 안에서 독창성이 펼쳐지죠. 서로 다른 시간대가 공존하는 성수동처럼 아더 스페이스에도 이질적인 개념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입장까지 30분 넘게 걸리는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서로 다른 것이 충돌하며 탄생한 개념은 스토어를 판매가 아닌 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변화시킵니다. 그 안의 상품도 작품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대림창고도 마찬가지, 겉과 속이 다르죠. 거기서 오는 충격은 낯선 경험이며 이는 감각을 깨우는 자극으로 흐릅니다. 인증하고 싶은 욕구는 덤이고요. 성수동에 많은 사람이 시작하던 타이밍이 대림창고가 복합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시기와 맞아떨어지는 이유입니다. 맞은편에 있는 수피는 들어가기 전까진 어떤 곳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무질서하게 부서진 벽돌 사이로 들어간 건물 안에서 세상 힙한 아이템을 만날지는 몰랐습니다.
서울이 다채로움을 보여주는 역동적인 극장이라면 성수동은 감성을 담당합니다. 완벽히 계산된 곳은 아니지만 수많은 배우의 땀과 노력이 스며든 무대. 지금처럼 자본의 개입이 심화된다면 다른 낡은 무대가 더 주목받겠지요. 그때 감성은 다른 기자가 찾아내겠죠.
아직은 여러 시간대 속 사람들이 쌓아올린 이야기가 두텁습니다. 멈추고 가까이 가야만 보이는 매력이요. 그 매력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입어봐야 제2의 성수가 탄생할까요? 수많은 점이 모여 선이 되는 문화 도시의 등장을 지금부터 바라는 건 비단 기자만의 욕심이 아닐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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