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AAA)은 레고랜드 사태 이후인 지난달 17~26일 네 차례에 걸쳐 1조20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하려고 했지만 응찰액이 9200억원에 그쳤다. 2800억원의 회사채 발행예정량을 채우지 못한 셈이다. 발행액도 목표액(1조2000억원) 대비 5900억원에 그쳤다. 최근 3년 동안 한전이 회사채를 발행하면서 발행예정액을 채우지 못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SK그룹의 지주사인 SK㈜는 오는 10일 3년물과 5년물의 장기 기업어음(CP)을 각각 1000억원씩 발행한다. SK㈜가 만기 1년 이상의 장기 CP를 발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자 신용등급이 AA+로 우량 등급인 SK㈜마저 CP 발행에 나선 것이다. SK㈜의 회사채 발행은 지난 9월 이후 멈춘 상태다.
한화솔루션(AA-)은 지난달 21일 총 1500억원어치 회사채를 발행하기 위해 수요예측을 실시했다. 연 6% 초반대 금리였으나 2년물에만 130억원의 매수 주문이 들어오고 500억원어치 3년물에는 단 한 건의 주문도 들어오지 않았다.
기업 자금조달의 한 축인 회사채 시장이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대기업마저 발행목표액을 채우지 못하는 미매각 사태가 속출했다.
기업들은 급한 대로 은행을 찾았지만 이자부담이 걱정이다. 글로벌 인플레이션 여파로 한국은행의 기준금리는 어느덧 연 3.00%까지 올랐고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계속된 자이언트 스텝(0.75%p 인상)으로 추가 인상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문제는 자금조달 여건이 단기간내 개선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글로벌 경기침체, 고금리 상황에서 지방채 디폴트로 불거진 레고랜드 사태까지 겹치면서 채권시장의 신용경색이 지속되고 있다.
◇ 금리 높여도 회사채 미매각 속출…기업 자금조달 비상
8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초부터 이달 27일까지 발행된 회사채 264건 중 40건(15.15%)이 발행예정액을 채우지 못했다. 이른바 미매각된 것이다. 특히 40건 중 14건은 이번달에 발행된 회사채다.
회사채 시장에 대한 수요는 빠르게 식고 있다. ‘공모회사채 수요예측 실시 현황’에 따르면 공모 무보증사채 수요예측 경쟁률은 지난해 3분기 348%에서 올해 3분기 196%로 152%p 낮아졌다. 레고랜드발(發) 신용경색 우려가 반영된 4분기 경쟁률은 더 내려갔을 것으로 보인다.
기준금리 인상, 안전자산 선호현상 등으로 신용등급 BBB 이하 채권에 대한 투자 수요는 더욱 감소했다. 회사채 ‘AA- 무보증 3년물’ 금리는 올해초 2.46%에서 지난 7일 5.662%까지 올랐고, 같은 기간 ‘BBB- 무보증 3년물’ 금리는 8.316%에서 11.511%로 치솟았다.
신용등급 BBB+인 한진은 2년물 300억원을 모집했지만, 10억원 주문에 그쳤다. 한화솔루션(AA-)과 LG유플러스(AA) 등 우량 등급 기업들도 수요예측이 기대에 못 미쳤다.
신용등급이 안 좋은 회사들은 아예 회사채를 발행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정부는 자금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를 가동했지만 시장 분위기는 여전히 냉랭하다.
◇기업 은행 대출 한달만에 9.7조↑…“이자부담이 문제”
기업들은 급한 대로 은행을 찾았다. 대출을 통해 자금을 미리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지난달 말 기준 5대 은행의 기업대출 잔액은 704조6707억원으로, 한 달 전보다 9조7717억원이나 늘었다. 그중 대기업 대출이 6조6651억원을 차지했다.
다만 은행 대출은 이자가 부담이다. 미국 연준이 지속해서 금리를 올리고 있고, 한국은행도 외화 유출을 막기 위해 금리 인상에 나서고 있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는 지난해 7월 0.5%에서 지난달 3%로 2.5%p 인상됐다. 오는 24일 열리는 금융통화위원회에서도 추가 인상될 것이 확실하다.
지난 2분기말 기준 예금취급기관의 산업별 대출금 잔액은 1713조1000억원이다. 대출금리가 0.5%p 높아져도 갚아야 할 이자가 1년에 8조5000억원이 더 는다. 특히 신용도가 낮은 중소기업들의 자금난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대기업 10곳 중 3~4곳(37%)은 영업이익으로 이자 비용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또 기준금리 3% 시 취약기업 수는 10곳 중 약 6곳(59%)으로 늘어난다고 추정됐다.
한 재계 관계자는 “보유 현금이 부족한 기업은 도산이 우려된다”며 “경기 침체로 수요가 꺾인 상황에서 자금 흐름까지 막히면 버티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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