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들이 실질상 5년 만기를 예상하고 투자한 신종자본증권 중도상환(콜옵션) 미행사 사태가 발생하자, 국내 기업들이 발행하는 외화표시채권(한국물·Korean Paper) 가격이 전반적으로 급락하며 그 여파가 거센 상황이다. 흥국생명의 해당 증권 가격은 1일 콜옵션을 미행사하겠다는 공시 후 나흘간 27.5%나 폭락했다. 당분간 국내 기업의 외자 조달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내년에 만기가 도래하는 외화채권을 보유한 한화생명·KDB생명·신한라이프 등 일부 보험사들이 자금난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9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흥국생명은 9월7일 이사회를 열고 2017년 11월 발행한 5억 달러(발행 당시 약 5571억원) 규모의 해외 신종자본증권에 대해 차환 발행을 통해 콜옵션을 행사(중도상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흥국생명은 발행 여건이 어려워지자 콜옵션 행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지난달 31일 이 결정을 철회했다.
흥국생명의 이같은 결정은 새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흥국생명은 기존 빚을 차환하려면 연 12% 수준 금리를 감당해야 했는데, 이보단 페널티가 부가돼 표면금리가 인상(스텝업)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결과로 보인다. 콜옵션 미행사 시 해당 증권의 표면금리는 현재 4.475%에서 연 6.742% 수준으로 높아질 예정이었다.
이후 이 회사의 해당 증권 콜옵션 미행사 사태가 국내외 금융시장에 미치는 후폭풍은 거셌다. 국내 금융기관의 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이 연기된 것은 2009년 우리은행 후순위채 이후 13년 만이었다. 그만큼 다른 보험사와 은행의 신종자본증권 가격도 동반 하락하는 등 금융시장에 미친 충격파도 컸다.
4일 기준 국내 4대 금융지주(KB·신한·하나·우리금융지주)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 평균은 2017년 11월 이후 5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인 75bp(0.75%)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말(22bp)과 비교해 3배 넘게 뛰었다.
국가신용도의 위험 수준을 보여주는 CDS 프리미엄은 국제금융시장에서 우리나라의 대외신인도를 측정하는 지표다. 특정 채권의 부도 때 거래 상대방으로부터 원금을 받을 수 있는 파생상품으로 한국 정부 채권의 부도에 대비한 보험료 성격이다. CDS 프리미엄이 높을 수록 채권을 발행한 기관이나 국가의 신용위험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표가 상승하면 우리나라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려 정부의 외화자금 조달 비용을 높을 뿐 아니라 해외자본의 유출과 국내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NH투자증권에 따르면 내년에 만기가 도래하는 한국물은 올해보다 21%가량 늘어난 250억 달러(약 34조6250억원)에 달한다.
당장 일부 보험사는 내년 신종자본증권 중도상환일이 다가오는데 시장에선 흥국생명과 같은 상황이 연출될까 우려되는 상황이다. 한화생명 달러화 신종자본증권은 발행 당시 100달러였던 액면가가 흥국생명 사태 직후 70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2025년 9월이 콜옵션 만기인 동양생명 신종자본증권은 10월 말 83 달러(약 11만4955원)에서 이달 4일 52 달러(약 7만2020원)까지 떨어졌다. 한화생명은 내년 4월 10억 달러(1조3830억원)의 신종자본증권 중도상환일이 도래한다. KDB생명보험 역시 내년 5월 2억 달러(2766억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만기가 도래한다. 신한라이프는 내년 11월 3억5000만 달러(약4830억원)의 후순위채 콜옵션이 예정됐다.
문제는 한국물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 세계 기준금리 상승 기조가 당분간 꺾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안예하 키움증권 연구원은 “(이달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이후) 최종 금리 수준은 더 상향 조정될 수 있다는 제롬 파월 연준 의장 발언으로 사실상 속도 조절은 금리 인상 중단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며 “이와 같은 미 연준 정책을 고려하면 시장 금리 방향은 금리 동결에도 우상향 가능성이 높다는 걸 시사한다. 투자 심리 회복은 다소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외화채 중도상환이 예정된 한화생명·KDB생명·신한라이프 등은 콜옵션 행사에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대비하겠다는 입장이다. 흥국생명 관계자는 “흥국생명, DB생명 등과 달리 내년 4월 예정인 해외 신종자본증권에 대해 콜옵션을 시행해 조기 상환을 할 것”이라며 “조기상환은 추가 자본조달 없이도 가능한 수준으로, 현재 발생한 금융시장 변동성은 당사에 영향이 없다”고 강조했다.
한편 흥국생명에 이어 내년 상반기로 원화 신종자본증권의 콜옵션 미행사를 선언한 DB생명은 투자자와 사전협의를 끝낸 뒤 콜옵션 행사일을 변경한 만큼 바뀐 계획대로 내년 5월에 중도상환을 실행하겠다고 밝혔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투자자들은 언제든 이런 상황(콜옵션 미행사)이 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인식이 박혔다”며 “이번 번복으로 인해 투자자들의 불만이 일정 부분 완화됐지만, 보험사 신종자본증권에 대한 디스카운트 요소는 이전에 비해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렇지만 보험사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영향은 많이 달라질 수 있다”며 “보험사들이 콜옵션 행사 여부를 더 신중히 결정하면 앞으로 미칠 충격 자체는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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