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량 대기업도 CP시장 기웃… 中企는 “대출-회사채 꿈도 못꿔”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10일 03시 00분


[자금시장 경색]
돈줄 말라붙어가는 기업들

SK그룹의 지주사인 SK㈜는 10일 3년물과 5년물 기업어음(CP)을 1000억 원씩 발행할 예정이다. 회사채 시장의 ‘큰손’이었던 SK㈜가 장기 CP를 발행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자금 시장 경색으로 현금 확보에 어려움이 커지자 이 회사는 “자금 조달처를 다각화해야 한다”며 이런 결정을 내렸다. 현대차그룹의 금융 계열사인 현대커머셜도 이달 4일 연 6% 금리로 38일물 CP를 발행했다.

상대적으로 자금 여력이 풍부한 대기업들마저 단기자금 시장을 기웃거릴 정도로 채권시장이 잔뜩 얼어붙었다. 대기업은 현금 확보에 안간힘을 쏟고 있고, 중소기업은 아예 자금 조달이 안 돼 고민이다. 자금시장 경색이 생각보다 오래가고 있는 것은 정부의 미숙한 대응이 시장의 불안감을 더욱 키운 결과라는 지적도 나온다.
○ 대·중소기업 모두 현금 확보 비상
석유화학 기업 한화솔루션은 지난달 말 1500억 원어치 회사채 발행을 위해 수요예측을 진행했다. 신용등급 ‘AA―’의 우량 대기업으로서 6% 초반대의 높은 금리를 제시했지만 만기가 짧은 2년물에만 매수 주문이 들어오고 3년물에는 주문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올 1월만 해도 회사채 발행 물량의 세 배가 넘는 주문이 몰렸는데 지금은 높은 이자에도 좀처럼 투자자를 구하기가 힘들다.

요즘 자금시장 경색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가리지 않는다. 최근에는 중소기업을 주로 지원하는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을 받아 대기업 계열사들이 채권 발행에 나서기도 했다. 물론 당장 자금 부족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는 곳은 드물지만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현금 확보에 나선 대기업이 많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경영 불확실성이 나날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현금을 가능한 한 많이 쌓아둬야 한다”며 “현재의 파도를 견디고 미래 투자를 대비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말했다.


CP라도 발행하는 대기업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신용등급이 좋지 못한 대다수 기업들은 최근 은행 대출도, 회사채·CP 발행도 ‘그림의 떡’이 됐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중소·중견기업들은 회사채는 꿈도 못 꾸고, 은행에서는 문전박대를 당하고 있다”며 “CP도 투자 수요가 없어 아무리 높은 금리를 줘도 발행을 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CP 시장에서도 최고 등급인 A1 정도를 제외하면 그 아래 등급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히 중소기업은 가파른 기준금리 인상의 여파로 자금난을 더 심하게 겪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달 3150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주요 경영애로로 고금리를 꼽은 기업이 27.5%로 전월(19.3%) 대비 대폭 늘었다.

우량 대기업이 CP 시장으로 몰리면서 채권시장에서 중소기업의 입지는 더 좁아지고 있다. 경북 소재 한 중소기업 대표 A 씨는 “재료비와 인건비가 치솟고 대출 금리도 올라 하루에도 몇 번씩 은행에 손을 벌리고 있다”며 “신용도가 높은 대기업으로 자금이 쏠리다 보니 필요할 때 돈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정부 뒷북 대응도 사태 키워”

정부가 이번 사태에 ‘뒷북 대응’으로 일관하면서 오히려 기업들의 자금난을 악화시켰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채권시장 대혼란을 촉발시킨 ‘레고랜드 사태’는 강원도가 지급 보증 약속을 불이행하겠다는 선언을 한 지 거의 한 달이 지나서야 정부가 부랴부랴 대책을 내놨다.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조기상환권) 미행사 역시 금융당국은 내용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에도 별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해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해외시장에서 한국물에 대한 인기가 폭락하는 등 파장이 커지자 뒤늦게 흥국생명의 콜옵션 행사로 방향을 틀었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정부가 대책을 더 빨리 내놨어야 했다”며 “레고랜드 사태도 중앙정부 차원에서 초반에 상황 정리를 빨리 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대기업#cp시장#기업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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