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시드니에 사는 로저 홀트 씨(67)는 내년 초 베트남과 대만에서 2주를 보낼 계획이다. 공무원으로 25년간 일하다가 60세에 퇴직한 뒤 매년 두 차례 해외여행을 즐기고 있다.
홀트 씨가 이처럼 여유로운 노후 생활을 보내는 것은 호주 퇴직연금 ‘슈퍼애뉴에이션’으로 매달 4200호주달러(약 370만 원)를 받기 때문이다. 그는 은퇴 전까지 25년간 월급의 9% 정도를 꼬박꼬박 퇴직연금에 넣었다. 퇴직 후 연금 계좌에 쌓인 돈은 85만 호주달러(약 7억4800만 원)로 ‘연금 백만장자’에 맞먹는다. 그는 “퇴직연금 덕분에 경제적인 면에서 은퇴 전후로 달라진 게 별로 없다”고 말했다.
올해로 도입 30주년이 된 슈퍼애뉴에이션은 ‘연금 천국’ 호주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세금이 한 푼도 투입되지 않고 운용되면서도 연 8%대 수익률을 올리는 슈퍼애뉴에이션은 2212만 명 호주 근로자의 노후를 책임지는 사회 안전망이 되고 있다.
○ 호주 연금 백만장자 6년 새 8배로
1980년대부터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로 고민하던 호주는 2층 퇴직연금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모든 근로자의 가입을 의무화한 슈퍼애뉴에이션을 1992년 도입한 것이다. 당시 고용주가 월급여의 3%를 근로자 퇴직연금 계좌에 의무 납부하는 것으로 출발해 올해 납입률은 10.5%로 높아졌다. 2025년엔 12%까지 늘어난다.
이에 따라 퇴직연금 자산 규모도 2015년 1조 호주달러를 넘어선 데 이어 9월 말 현재 3조3220억 호주달러(약 2932조 원)로 급증했다. 한국 국민연금(1037조8780억 원)의 3배에 가까운 규모다. 자산운용사 IFM인베스터스의 잭 메이 이사는 “퇴직연금 자산은 수년 내 4조5000억 호주달러까지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슈퍼애뉴에이션의 10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8.1%에 이른다. 닉 셰리 전 호주 연금기업부 장관은 “든든한 수익률 때문에 호주 근로자들은 퇴직연금을 재테크 수단으로 여기고 의무 납입률에 더해 평균 3∼4%를 더 넣는다”고 했다. 데이비드 오브라이언 씨(67)도 “40년간 다른 재테크는 하지 않고 퇴직연금에만 돈을 부었다. 3월 은퇴 후 전국 일주를 하며 노후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연금 규모가 커지고 수익률이 고공행진하면서 ‘연금 백만장자’도 늘고 있다. 지난해 말 현재 잔액이 100만 호주달러 이상인 퇴직연금 계좌는 2만677개로 2015년에 비해 8배 가까이 급증했다.
○ ‘디폴트옵션+기금형 제도’로 날개 달아
슈퍼애뉴에이션이 탄탄한 수익률을 이어가는 것은 연금 자산의 절반 이상이 국내외 주식 등으로 적극 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인프라 투자 비중도 16%가 넘는다. 퇴직연금 수탁회사 ‘시버스’의 저스틴 아터 대표는 “국내외 공항, 항만, 철도 등 인프라에 적극 투자해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했다.
특히 2013년 6월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이 도입되며 수익률에 날개를 달았다. 이는 가입자가 별도의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미리 정해 놓은 상품으로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제도다. 호주 퇴직연금 수탁사들은 실적배당형 상품에 적절하게 자산을 배분해 수익률을 끌어올렸다. 현재 슈퍼애뉴에이션 가입자의 약 80%가 디폴트옵션에 가입돼 있다.
여러 기업의 퇴직연금을 한데 묶어 수탁법인이 운용하는 ‘기금형 연금’ 제도를 일찌감치 도입한 것도 슈퍼애뉴에이션만의 특징이다. 수탁법인 전문가들이 연금 운용 및 관리를 전담하며 시장 상황에 맞춰 투자 결정을 하는 것이다. 가입자들이 다른 기금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수탁법인 간 경쟁이 치열하다.
또 호주 금융당국인 건전성감독청(APRA)은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수익률이 일정 수준 이하인 수탁법인을 매년 발표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지난해부터는 수익률 최하위 수탁법인을 시장에서 퇴출하는 제도도 시행하고 있다. 호주 투자자문사 프런티어의 데이비드 카루더스 수석컨설턴트는 “퇴직연금 시장에서 퇴출되지 않기 위해 수탁법인들이 최고 전문가들을 투입해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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