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기업이 미래다]국내 철도차량 발주의 문제점과 과제
1단계에선 최저기준 충족 시 모두 통과, 2단계서 가격 부문만 평가해 최종 낙찰
저가로 수주 따낸 뒤 납기일 못 지키기도… 업체 사업 수행 능력 평가 변별력 잃어
서류 평가 강화해 실행 능력 검증하는 ‘종합심사평가낙찰제’ 도입 목소리 커져
“잇따른 철도 사고에 국민 불안감 증폭… 고품질 제품, 납품 능력보고 입찰해야”
국내 철도차량 시장에서 최저가 수주 경쟁이 산업 생태계를 무너뜨린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질적으로 최저가 낙찰제로 운영되는 현행 ‘2단계 입찰제도’로 인해 철도 시장이 품질보다는 가격 낮추기 경쟁 구도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저가 입찰로 수주부터 따낸 뒤, 계약이행 능력 부족으로 납기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현장에선 노후 전동차나 수명이 지난 부품을 제때 교체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고장이나 안전사고 우려가 제기된다. 국가·공공기관이 공공조달 형태로 발주한 철도차량 사업에선 업체를 선정할 때 단순히 차량 가격 외에도 성능, 품질, 사업 수행 능력, 사회적 책임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방 사업을 비롯한 다른 공공입찰 시장에선 1단계 평가가 업무표준으로 지켜지고 있는데, 철도차량 입찰에서는 잡음이 끊이지 않아 평가기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다.
평가 통과한 입찰자가 저가 수주 후 납기 못 맞춰 문제
흔히 최저가 입찰제로 불리는 ‘2단계 입찰 방식’을 두고 최근 업계의 잡음이 잇따르고 있다. 2단계 입찰 방식이란 1단계에서 차량 제조업체의 기술 수준, 이행실적, 생산능력 등을 평가하여 최저 기준만 충족하면 통과하는 방식으로 2단계에서는 가격 부문만 평가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2단계에서 가격만으로 낙찰 여부를 좌우하고 있다. 1단계에서 형평성이 결여된 항목과 배점기준, 절대평가 등으로 변별력을 잃어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최근 들어 사업 수행능력의 평가를 포함한 평가 자체에 대해 의문부호가 커지는 분위기다. 실제 2018년 이후로 철도공사와 서울교통공사 등의 공공기관이 도입하는 전동차 입찰에서 1단계 평가 통과 후 2단계에서 저가로 계약된 국내 대부분의 전동차들이 납기일을 맞추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여기에 철도 노후화 가속화로 인한 철도 사고도 잦아지고 있다.
서울교통공사에서 5·7호선 336량 계약을 수주한 A업체 측은 납품일자를 맞추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수주 후 착수 시점에서 글로벌 물류 이슈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으나, 관련 자료를 확인한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민주당 문정복 의원실 측은 제작상 문제였다고 결론 냈다. 업계에서도 설계능력을 포함하여 전반적인 계약이행능력의 부족을 주된 요인으로 보고 있다. 결국 서울시교통공사와의 납기 지연에 대한 책임소재는 법정에서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해당 업체의 주장대로 납기 지연이 일시적인 이유라고 하더라도 글로벌 물류 차질 이슈가 현재진행형인 가운데 철도와 같이 안전과 밀접한 제품에 관해선 납품 예측 가능성이 낮은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해당 업체는 2020년 이후 국내 철도 관련 시장에서 수주한 물량만 950량 수준에 이르는데, 결국 현재까지 순차적인 납기 지연이 이뤄지고 있다.
지연 문제가 언제 해결될 수 있을지를 두고서도 업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현재 납기 지연 문제를 안고 있는 A업체 측은 연간 300량 수준까지 생산량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입장이다. 공장 증설 등을 통해서 수주 물량에 대한 납기 지연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다른 관계자는 “A업체의 주장대로 연간 300량을 생산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수주 잔량을 기준으로 계약 물량을 소화하려면 공장을 100%로 가동할 경우에도 3년 이상 걸린다. 추가 생산은 현실적으로 무리다. 부품 수급부터 인력 운영, 생산설비의 가동, 공정대기 등을 고려한 적정 가동률을 고려한다면 생산 기간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업계에서 최저가 입찰제에 대한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계약자가 주어진 납기 내에 정상적으로 납품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설계한 능력·경험을 가지고 철도공사와 서울교통공사 등 수요기관과의 협의 및 승인 과정에서 요구하는 사항에 상세한 기술설명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부품공급 대부분을 입찰 전에 구상해 설계진행 과정에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철도공사와 서울교통공사 등의 국내 수요자가 입찰제안요구서(RFP)로 요구한 내용을 입찰자가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1단계 평가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현재의 평가기준으로는 중요 사항들이 2∼3시간의 짧은 입찰 평가과정에서 변별력이 없는 주관적 평가나 임의평가 등으로 이뤄지고 있어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고속전철의 입찰에서 많이 논란이 되는 입찰참가자격을 두고 철도공사와 업체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는 이유도 관행처럼 내려오는 철도공사의 평가기준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글로벌 철도 관련 시장에선 입찰 과정에서 입찰자의 사업수행능력 등을 확인하기 위하여 각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입찰서류 평가는 물론 현장방문 조사 등을 통해 3∼6개월 이상 세밀하고 꼼꼼하게 평가하여 계약수행에서 발생할 수 있는 납기 지연, 품질 저하 등의 문제를 사전예방하는 데 특별히 노력하고 있다,
이에 업계 관계자는 “현재 최저가 입찰 구조로는 필요한 제품의 제조에 적합한 현장 인원의 숙련도, 계약이행에 적합한 생산라인의 최적화 구성 정도 등도 입찰서에 반영하지 않고 있다. 현장 조사가 없다 보니 품질 및 납품 기한을 지킬 수 있는지 등도 평가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국가·공공기관이 구매하고자 하는 철도차량의 입찰제안요청서에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평가기준과 절차를 투명하게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는 이유다.
국내개발 기술 도태시키는 제2의 원전 사태 나올까 걱정
업계에선 2단계 입찰 방식에서 평가 기준을 강화하고 나아가 ‘종합심사평가낙찰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1단계 서류 평가에서 해당 업체의 전문성이나 제안 내용의 실행 능력을 객관적으로 충실하게 검증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들어 근본적으로 보완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최저가 입찰제가 국내 철도 산업의 경쟁력까지 깎아먹는다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현 최저가 입찰제는 기술 발전의 속도에 비해 평가제도 등이 제대로 발맞춰 따라오지 못한다는 한계도 있다.
철도공사와 서울교통공사 등 국내 수요기관이 1단계 평가과정에서 계약이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업체를 선별한 후 2단계를 진행한다는 ‘2단계 입찰 방식’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도 학계의 한 전문가는 “국내 철도 시장은 해외 선진국에 비해 시장 규모가 작아서 공공입찰이 산업 육성 측면에서 중요하다. 마땅히 해야 하는 정당한 평가를 소홀히 하고 단순한 저가 경쟁으로 흘러갈 경우 입찰제안요구서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제안서가 채택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계약이행 과정에서 납기 지연이나 품질 저하 등 부실한 계약이행의 소지가 많은 저가 제시 입찰자가 계약에 유리할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국내 철도 관련 업체들의 기술력은 글로벌 상위권 수준이다. 한 국내 업체의 경우 글로벌 시장에서도 드문 동력분산식(동력을 모든 칸으로 분산시켜 운행되는 기술) 고속전철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국가 차원에서 분산식 고속전철에 10여 년간 1000억 원 이상의 비용을 투자하여 설계기술을 확보한 것이다. 제품생산에 적합한 생산설비를 구축하고 부품을 개발하여 생산 저변을 넓히는 등의 노력을 통해 시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분산식 고속열차를 개발했음에도 이를 국내에서 활용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분산식 고속전철을 사용해야 하는 철도공사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담보로 하는 고속전철의 구매에서 가격뿐만이 아니라 제품의 품질, 납기 등은 물론이고 수명기간 동안 발생하는 비용(LCC, Life Cycle Cost)과 국내의 철도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를 살펴보고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동력분산식은 앞뒤 동력차로 이동하는 동력집중식에 비해 곡선구간이 많고 역거리가 짧은 국내 철도환경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차량 유지비도 낮출 수 있고 가속이 빨라지는 강점이 있어 상대적으로 더 선진 기술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국내 시장에서 활용할 수 없게 되면 결국 기술이 사장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이다. 동력분산식 기술을 개발해온 국내 업체 관계자는 “국내서 활용하지 않는 기술을 해외 시장에 수출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국내 육성이 미뤄지자 해외에서도 수주 난항을 겪었던 원전 관련 산업과도 철도 산업이 비슷한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권에서 한국 고속전철을 비롯한 철도차량 대량구매에 관심이 늘어난 상황에서 국내 산업을 육성하지 않고 해외 업체를 선정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해외 무기시장에서 크게 주목을 받는 K방산도 오랫동안 국내에서 쌓아 올린 경험을 바탕으로 마침내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지금의 성과가 있다고 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잘못된 구매로 연이은 철도 사고… 국민 고통은 외면
계약 이슈로 철도업계가 시끄러운 가운데 시민들은 연이은 철도 사고로 인해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11월 6일 오후 영등포역에서 무궁화호가 탈선하는 사고가 발생해 이용자들의 불안감이 확산됐다. 해당 사고 여파로 인해 다음 날 오전까지 1호선 열차가 지연 운행되기도 했다. 이어 21일 오전 8시 43분쯤 1호선 소요산행 열차가 차량 고장으로 동대문역에서 약 8분간 정차했다. 이로 인해 시민들이 출근길에 큰 불편을 겪었다.
지난달 18일 오전 7시 50분쯤 서울 도시철도 신림선 하선(관악산역 방면)이 출발역인 샛강역에서 열차 제동장치에 이상이 생겨 운행이 멈추는 사고도 발생했다. 신림선은 전날에도 퇴근시간대인 오후 6시 32분쯤 보라매공원역 분기기(열차를 다른 궤도로 옮기는 설비) 부근 안내 레일에 이상이 생겨 운행이 중단되기도 했다. 급기야 10일 오후 11시 4분에는 승객 177명을 태운 서울발 부산행 KTX가 부산 금정터널에서 고장으로 비상 정지해 후속열차의 연속된 지연 사태까지 발생했다.
업계 관계자는 “잦은 고장 원인의 하나로, 최근 2018년 이후로 철도공사와 서울교통공사 등의 수요기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부실한 2단계 입찰을 꼽을 수 있다. 예상되는 위험요인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한 잘못된 평가방식으로 최저가 업체에 몰아주기가 되면서 현재의 문제를 점점 키우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서 “1단계 입찰평가는 ‘누가 지금 수요자가 원하는 제품을 제대로 된 품질로 제때에 공급할 수 있는가’를 평가하는 과정이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순간 수많은 시행착오와 시간과 비용이 투입된다. 결국에는 고장과 안전사고로 귀결되고 그 고통은 전부 국민이 부담하게 된다. 입찰자의 사업 수행능력에 대한 확실한 근거나 실증 평가가 생략된 관행으로 발생할 피해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대로 된 제품을 제때 납품받기 위해서는 설계능력, 제작능력, 품질, 안전 등을 실질적이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평가기준의 재정립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노후 전동차를 계속 사용하게 되어 발생하는 고장과 안전사고는 결국 매일 전동차를 이용하는 다수 국민에게 오롯이 되돌아오게 된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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