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문 닫아야 할 처지죠. 30년 전 600곳이 넘었던 우리 상공회의소 회원사가 현재 80곳밖에 안 남았어요.”
지난해 12월 29일 강원 태백시 황지로. 태백상공회의소 함억철 사무국장은 텅 빈 2층짜리 건물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신입사원이던 1980년대만 해도 핵심 탄광촌으로 최고의 번화가로 꼽혔던 이곳은 이제 건물 곳곳에 ‘세입자 구함’이란 전단만 나붙어 있다. 인근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1년 넘게 세입자를 구해도 공실인 곳이 태반”이라고 했다.
지자체와 중앙정부가 지방 소멸을 극복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지만 ‘나눠 먹기식 예산 배정’으로 인구 유입에 실효성을 못 내고 있다는 지적이 커지고 있다.
2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강원 태백시·정선군, 경북 문경시 등 폐광지역 7개 지자체에는 1995년 ‘폐광지역 개발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정 이후 2021년까지 총 4조4055억 원이 투입됐다. 하지만 이들 지역의 ‘인구성적표’는 낙제점에 가깝다. 1996년 6만2436명이었던 태백시 인구는 지난해 11월 기준 3만9503명으로 4만 명 선이 무너졌다. 문경시는 9만3567명에서 7만1154명으로 주저앉았다.
年 1000억 폐광기금, 쪼개기 배정하니 노인정 지을 돈만
태백-삼척 등 강원남부 폐광지역 22년간 3조 투입에도 인프라 부족 외지기업, 불편한 교통에 입주 꺼려 “분산된 지방도시 집약적 재편해야”
#1. 강원 태백시의 통리공원. 태백시는 2017년 이곳에 드라마 ‘태양의 후예’ 세트장인 ‘우르크 성당’ 등을 복원하고 노후 건물을 사들여 5층짜리 게스트하우스로 만들었다. 관광객을 유입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5년이 지난 현재 통리공원은 사람 발길이 끊긴 을씨년스러운 공터로 변해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1층의 카페는 오후 3시에도 불이 꺼져 있었다. 인근 테마파크인 오로라파크에서 일하는 한상운 씨(75)는 “분위기가 우중충하다 보니 관광객들이 와도 카페는 다른 곳으로 간다”고 했다.
#2. 2007년 경북 문경시가 157억 원을 들여 만든 문경자연생태박물관. 축구장 10개에 육박하는 규모(약 6만3000m²)로 조성됐지만 하루 평균 관광객이 25명이 안 된다. 연간 입장료 수익이 1200만 원. 2014∼2021년 누적 적자만 26억여 원에 이른다. 배창우 문경소상공인연합회장(59)은 “매년 축제나 홍보 등에 열 올리고 있지만 구도심 상권 침체가 심각하다”고 했다.
중소도시들이 지역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지만 투입 예산과 노력이 인구 증가로 이어지는 사례를 찾기 쉽지 않다. 전체 예산은 막대해도 예산이 ‘나눠 먹기식’으로 집행돼 지역의 산업 체질을 바꾸거나 핵심 인프라를 조성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예산 쪼개기로 ‘육지 위의 섬’ 신세
현재 강원 남부 폐광지역은 지역을 관통하는 고속도로가 없다. 태백시에는 여객을 나르는 철도역이 3곳 있지만 고속철도(KTX)가 지나가는 역은 없다. 서울에서 차로 4시간 가까이 이동해야 하다 보니 ‘육지 위의 섬’으로 불릴 정도다.
이 같은 ‘도돌이표 패착’의 이유는 투입한 예산이 어디에 사용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강원 태백·삼척시, 정선·영월군 등 강원 남부 폐광지역이 대표적이다. 이 지역에 1997년부터 2019년까지 투입된 예산은 3조474억 원에 이르지만 35.6%(1조859억 원)가 노후 상·하수도 정비나 도로 포장 보수 등 기반시설 개선에 쓰였다. 지역 활성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대체산업 투자에는 가장 적은 5072억 원(16.6%)만 사용됐다.
강원랜드 매출 일부를 배분받는 폐광지역 개발기금만 해도 연평균 1000억 원에 이른다. 하지만 사전에 정한 비율대로 배분되면서 복지회관, 노인정 건립 등 단기성과를 낼 수 있는 사업 위주로 예산이 투입된다. 여러 지자체가 연계해 대규모 인프라를 조성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없다 보니 매년 각자 돈은 쓰지만 실질적인 변화를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인프라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산업단지를 조성해 기업 유치에 나서도 실적이 좋지 않다. 태백시 내 13만7270m² 규모로 들어선 장성농공단지에는 19개 업체가 입주했는데 태백시 외부에서 유입된 기업이 5곳에 그친다. 인근 철암농공단지도 전체 30개 업체 중 외부 유입 업체는 7곳뿐이다. 태백시 관계자는 “태백은 워낙 외지에 있고 교통이 불편해 외지 기업은 물류비 문제로 입주하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중장기 계획 없이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는 지자체는 태백시뿐만이 아니다. 전국산업단지 현황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7∼9월) 경북 상주시 한방산업단지에 입주한 업체는 3곳뿐으로 고용 인원은 6명에 그쳤다. 전북 익산시 함열농공단지(32만900m²)는 2019년 1월 준공됐지만 지난해 6월까지 미분양으로 남았다. 익산시는 단지 내 일부 부지(2만8000m²)를 매입해 그린 바이오 벤처 캠퍼스를 짓기로 했지만 일자리 창출 효과는 247명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 20조 원 투입해도 사업 표류
중앙정부 역시 사후 관리에 소홀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4년부터 추진된 도시재생 뉴딜사업이 대표적이다. 도시재생 뉴딜사업에는 국비 1조6000억 원 등 공공재원 21조8000억 원(2021년 6월 기준)이 투입됐다. 이영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에 따르면 2017∼2020년 도시재생 뉴딜사업지 중 주택정비사업이 계획된 198곳에서 정비사업이 끝난 사업지는 2.3%에 그쳤다. 70% 이상은 사업 포기, 재검토 등 표류 중이었다. 그는 “여러 지자체가 일단 예산부터 따기 위해 ‘공모용 계획’을 짜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강영환 대전대 행정학과 겸임교수는 “수도권에 공장이 있는 기업은 판매처, 유통, 물류, 인력이 확보됐으니 지방에 이전할 이유가 없다”며 “권역별 산학협력 체제 기반(플랫폼)을 구축하고 청년층 정주 여건을 개선하는 게 시급하다”고 했다.
전지성 강원연구원 강원탄광지역발전센터장은 “태백은 도시가 고리처럼 동그랗게 퍼져 있는데 쪼개기 식으로 예산이 투입돼 도심 활성화 효과가 적었다”라며 “대체산업 활성화 지역에 공공예산을 집중적이고 장기적으로 투자해야 미래 비전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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