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핀 아르노(48). 최근 전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프랑스 재벌집 큰 딸’입니다. 세계 최고 부자인 아버지로부터 ‘잘 나가는’ 자회사를 물려받은 가문의 장녀이니까요. 델핀은 아버지인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 그룹 회장(74)으로부터 11일(현지시간)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최고경영자(CEO)로 임명돼 2월부터 임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델핀은 글로벌 스타트업계의 ‘보이지 않는 큰 손’이기도 합니다. 이번 스테파니는 스타트업과 혁신을 강조하는 프랑스 재벌집을 소개합니다. (스테파니는 ‘스’타트업과 ‘테’크놀로지를 ‘파’헤쳐보‘니’의 준말입니다.)
델핀은 그동안 루이뷔통 총괄 부사장을 맡아 왔는데요. 아버지인 아르노 회장은 이날 성명을 내고 딸에 대한 신뢰를 강하게 드러냈습니다. “델핀의 리더십 하에 루이뷔통 제품에 대한 호감도가 크게 높아져 브랜드가 새로운 판매 기록을 세울 수 있게 됐다. 델핀의 예리한 통찰력과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은 디오르의 지속적인 발전을 이끄는 결정적 자산이 될 것이다.”
단순히 재벌집 큰 딸이어서가 아니라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얘기입니다. 프랑스 비즈니스 스쿨 EDHEC와 영국 LSE(런던 정경대)를 나온 델핀은 맥킨지에서 컨설턴트로 일한 뒤 2003년부터 디오르에서 전략을 담당하며 브랜드를 성장시켰습니다. 사실 디오르는 LVMH그룹의 모태이자 DNA 격입니다. 1984년 당시 34세였던 아르노 회장이 경영난을 겪던 디오르를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가방회사 루이뷔통과 주류회사 모엣에네시 등을 인수합병하며 1987년 LVMH 그룹을 시작했으니까요.
2008~2013년 디오르 부사장을 지낸 델핀은 이번 인사 발표 전까지는 루이뷔통 부사장을 맡으며 루이뷔통의 모든 제품 활동을 총괄했습니다. 특히 2014년 신진 디자이너들을 발굴하는 ‘LVMH 프라이즈’를 만들어 지금까지 이끌어오고 있는데요. 우승자에게 30만 유로의 상금과 1년간의 맞춤형 멘토링을 제공하는 이 프라이즈는 전 세계 ‘패션 꿈나무’들의 희망입니다. 예술에 해박한 델핀은 최근 세계적 아티스트인 야요이 쿠사마와 루이뷔통의 협업도 이끌어냈습니다. 올해 루이뷔통의 신제품들에 쿠사마의 ‘작품’들이 대거 적용돼 있습니다. 지금 한창 프랑스 파리와 일본 도쿄 등 주요 글로벌 도시들의 루이뷔통 플래그십 스토어 외관에도 ‘쿠사마표 물방울무늬’를 장식해 미술관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델핀은 디자인 인재만 발굴해 온 게 아닙니다. 그는 글로벌 스타트업계의 ‘보이지 않는 큰 손’입니다. 2018년 5월 프랑스의 글로벌 스타트업 박람회인 비바 테크놀로지에서 귀빈석 앞자리에 나란히 앉은 델핀과 아르노 회장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LVMH그룹은 이 스타트업 박람회의 주된 후원사입니다. 당시 아르노 회장에게 다가가 인사했더니 그는 말했습니다. “앞으로 더 기대해주세요. 우리는 계속 혁신할거니까요.” 명품 회사인 LVMH 그룹이 가장 강조하는 가치는 혁신입니다. ‘결코 나서지 않고 차분하게 할 일을 한다’는 평가를 듣는 델핀은 그 때 아버지 옆에서 조용하게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LVMH그룹은 2017년부터 잠재력 있는 스타트업을 발굴해 자신들의 브랜드와 협업할 기회를 주는 상을 수여해 오고 있습니다. ‘LVMH 혁신 어워드’입니다. 이 상을 사실상 델핀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왜 LVMH는 이 상을 만들어 운영할까요. 에르노 회장은 말합니다. “저도 엔지니어 출신이지만(프랑스 명문 공대인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 기술은 우리 사업에 속도를 부여합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기업이지만 스타트업 정신으로 무장하려고 합니다. 이 상을 통해 스타트업은 우리와 협업할 수 있고 우리 그룹은 창의성, 혁신, 기업가 정신의 가치를 공고히 할 수 있습니다.”
델핀은 2005년 이탈리아 와인 재벌과 결혼했다가 헤어진 후 프랑스의 억만장자 기업가인 자비에 니엘과 두 자녀를 낳고 살고 있습니다. 통신 재벌인 니엘은 프랑스 신문 ‘르 몽드’의 공동 소유자이자 추정 재산이 80억 유로에 달하는 프랑스의 12번째 부자입니다. 니엘은 2010년 ‘키마 벤처스’라는 벤처캐피털 회사(VC)를 차려 매년 100개의 스타트업에 2000만 유로를 투자하는 ‘스타트업계의 대부’입니다. 2013년 프랑스의 무료 코딩학교인 ‘에콜 42’를 세웠고, 2017년에는 파리에 세계 최대 규모의 스타트업 인큐베이터 기지인 ‘스타시옹 F’를 세워 프랑스를 ‘창업국가’로 만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스타시옹 F의 각종 행사 때 니엘의 주변에는 LVMH 혁신 어워드를 이끄는 델핀이 자주 보입니다. 이들은 프랑스 스타트업 생태계를 키우는 동반자입니다.
스타시옹 F에는 1000여 개의 스타트업이 입주해 있습니다. 이 중에는 지난해 LVMH 혁신 어워드를 받은 한국 스타트업 ‘마크비전’도 있습니다. 지난해 LVMH 혁신 어워드에 지원한 950개 스타트업 중 21개의 결선 기업에 올라 최종 수상한 7곳 중 한 곳입니다. 인공지능(AI) 기술로 위조상품을 모니터링하고 제거하는 기술력을 지닌 이 스타트업은 이 대회의 데이터&AI 분야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미 하버드대 경제학과를 나와 독일 중앙은행과 맥킨지에서 일하다 창업한 이인섭 마크비전 대표는 말합니다. “아르노 회장이 직접 혁신 어워드 스타트업들을 시상했는데요. LVMH는 마라톤을 하듯 장기적 시각으로 기업을 운영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당장의 매출보다는 기술에 열린 마인드로 신사업 투자에 관심이 높더라고요. 이 상을 받아 스타시옹 F에 입주하면서 글로벌 스타트업들과 협업하는 기회를 수시로 갖고 있습니다. LVMH 그룹의 주요 브랜드 세 곳과도 계약해 ‘짝퉁’ 명품을 막는 일을 하고 있고요.”
‘프랑스 재벌집’인 LVMH는 가업 승계가 한창입니다. 첫째인 델핀은 크리스티앙 디오르, 둘째인 앙투안은 그룹 지주회사, 셋째인 알렉산드르는 티파니, 넷째인 프레드릭은 태그호이어, 다섯째 막내인 장은 루이비통 시계부문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체불가토큰(NFT)과 메타버스 등 새로운 기술들을 명품 산업에 접목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아버지인 아르노 회장은 최근 LVMH그룹의 CEO 정년을 75세에서 80세로 늘렸습니다. 그룹 회장이라는 자리를 좀 더 지키면서 다섯 자녀의 경영 활동을 지켜보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세계 1등 부자인 아버지가 강조하는 혁신과 스타트업 정신을 어떻게 구현할지가 ‘프랑스 재벌집’ 자녀들의 경영 시험대가 될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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