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飛’는 예티항공 691편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우리 국민 2분과 그 외 모든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자유로운 해외여행’이 사실상 가능해진 명절 연휴입니다. 한국관광공사는 이번 설 연휴기간동안 37만 명 넘는 인원이 해외여행을 떠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가장 큰 국제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에서만 약 30만 명이 출국할 것으로 예상됐는데, 작년과 비교하면 무려 1236% 증가한 수치입니다.
3, 4일 간 짧은 연휴에 멀지 않은 국가로 해외에 나갈 때 여행객이 가장 많이 접하게 될 비행기가 아마 보잉의 소형 비행기 737 기종이 아닐까 싶습니다. 1968년 처음으로 승객을 태우고 이륙한 이후 지금까지 총 1만1100대가 넘는 보잉 737이 하늘을 날았거나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잉 737은 현재 생산되고 있는 737MAX 기종을 끝으로 더 이상 새 기종이 나오지 않고 단종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최근 보잉이 겪었던 여러 가지 사건과 그로 인한 미국 정부의 규제 신설로 737 기종을 업그레이드할 이유가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날飛’에서는 한 시대를 주름잡았지만 이제는 그늘이 드리운 이 작은 거인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보잉이 737을 업그레이드한 기종 737MAX를 내놓으면서부터입니다. 737 MAX는 기존에 있던 737NG(New Generation)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모델입니다. 자동차 회사에서 같은 이름의 차를 세부 디자인 변화, 신기능 추가 등으로 포장한 뒤 ‘페이스리프트’ 모델을 내놓는 것과 비슷합니다.
737MAX는 2017년 상업비행을 시작한 최신 기종이지만 보잉이 유례 없는 위기를 맞게 한 기종이기도 합니다. 2018년 인도네시아의 ‘라이온 에어’와 2019년 에티오피아항공의 737MAX 기종이 잇따라 추락했기 때문입니다. 두 항공기의 사고 원인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원가 절감에 집착하던 보잉이 안전 시스템을 제대로 설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변명할 수 없는 보잉의 실책이었습니다.
추락의 귀책 사유가 보잉에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찾아내서 보도한 시애틀타임스의 도미닉 게이츠 기자와 취재진은 이후 미국 연방항공청이 신규 기종 등에 대한 감항성 인증(항공기가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국가기관이 증명하는 인증) 절차를 직접 진행하지 않고 보잉에 사실상 위탁해 진행했다는 사실까지 폭로합니다.
보잉에 대한 분노가 전 세계에서 들끓자 미국 의회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2020년 가을 미국 의회는 항공기 인증에 대한 국가기관과 항공사의 책무를 강화하는 ‘항공기 절차 인증 개정 및 책임에 관한 법률’(the Aircraft Certification Reform and Accountability Act, H.R.8408)을 제정합니다. 사실상 보잉과 737MAX를 겨냥한 법률입니다. 그리고 이 법률 안에 보잉737의 ‘강제 은퇴’를 선언하는 내용이 숨어있습니다.
위 법률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인명이나 화물 수송 목적의 비행기에는 운항승무원(조종사) 경보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어야 한다. 이 시스템에서는 경보와 주의보와 각종 안전에 대한 안내 사항이 구분되어 표시돼야 한다. 또 운항승무원이 문제 상황을 해결하거나 조치를 취할 때 해야 할 행동을 우선순위를 지정해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보잉737에는 이런 시스템이 탑재돼 있지 않다는 겁니다. 보잉은 737MAX의 조종석을 보잉787 등 최신 항공기와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지만, 여기에 보잉787 등 다른 기종에 탑재된 경보 시스템은 탑재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모양만’ 최신으로 보일 뿐 속은 그대로라는 의미입니다.
보잉에서는 이 승무원 경보 시스템을 엔진 정보 표기 및 승무원 경보 시스템(EICAS·Engine Indicating and Crew Alerting System)이라고 부릅니다. 보잉사의 다른 비행기인 747 767 777 787 기종에는 모두 이 시스템이 장비돼 있습니다. 같은 역할을 하는 시스템이 에어버스에서도 전자 중앙 집중식 항공기 관리 시스템(ECAM·Electric Centralized Aircraft Moniter)이라는 이름으로 탑재돼 있는데, 에어버스는 모든 기종에 이 장비를 탑재하고 있습니다.
EICAS 시스템은 사소하게는 어느쪽 항공기 문이 열려 있다는 표시부터 중요하게는 심각한 안전상 문제까지 알려줍니다. 조종사는 EICAS에 표시된 메시지를 확인하고 그에 맞는 조치를 취합니다. 777 787 등 최신 항공기에는 조종사가 해야 할 조치까지 순서대로 나열해줍니다. 737MAX에 EICAS가 없다는 건 자동차로 예를 들면 이런 상황입니다. 최신 기종 차의 문을 열었는데, 어느 문이 열렸다는 표시가 디스플레이에 그래픽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빨간색 경고등만 하나 켜지고 끝인 상황.
자동차 문열림 경고등이 켜지면 모든 문을 열었다 닫아봐야 하듯이 737 조종사들은 경고등이 켜지면 일단 그 경고등이 ‘왜’ 켜졌는지부터 알아내야 합니다. 수많은 곳에 분산된 경고등을 수시로 확인하는 것부터가 일입니다. 반면 EICAS가 탑재된 기종의 조종사들은 바로 문제를 해결할 조치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비상상황에서라면 두 조종사의 업무량 차이가 상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보잉이 다음 737을 업그레이드할 때 EICAS를 장착하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문제는 해결되겠지만 항공사에서 더 이상 그 737을 선호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돈 받고 사람을 태우는 항공사에서는 비행기에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되면 무조건 조종사를 새로 교육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항공사는 이 교육제도를 최대한 피하려고 합니다. 적잖은 교육기간동안 업무에 투입할 수 없으니까요. 교육비용도 상당합니다. 보잉이 737MAX를 출시하면서 추가된 조종 장비(MCAS)를 기를 쓰고 감추려고 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교육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수많은 항공사에서 운용하고 있는 737 기종이 건재하기 때문에 앞으로 수십년 간 더 공항에서 737을 보고 탈 수 있을 겁니다. 위에서 언급한 H.R.8408 법안 때문에 보잉은 현재 737MAX 중 두 하위기종(MAX 7과 MAX 10)의 인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보잉과 미국 내 737을 주로 운용하는 대형 항공사들의 로비로 결국 인증을 받아낼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 많습니다.
하지만 최초의 737인 레거시 기종(100, 200)을 시작으로 클래식 기종(300, 400, 500) - 차세대 기종(NG, 600~900) – MAX로 이어졌던 737의 역사는 막내인 MAX를 끝으로 끝날 공산이 높아졌습니다. 737보다 늦게 태어나 하늘을 주름잡은 ‘하늘의 여왕’ 747도 이미 생산이 중단되었습니다. 흥망성쇠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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