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지는 역전세난]
서울 아파트 전셋값 하락에 ‘역전세난’ 확산
집주인, 돌려줄 전세금 마련 못해
세입자, 이사 계획 포기하기도
서울 양천구 ‘목동신시가지 9단지’(전용면적 71㎡) 집주인 이모 씨(54)는 최근 세입자에게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려 은행 예금을 깼다. 2년 전 7억 원대로 치솟았던 전세 시세는 4억 원대로 주저앉았다. “차액을 돌려줘야 계속 살겠다”는 세입자에게 사정해 7000만 원만 돌려주는 선에서 겨우 합의했다. 그는 “세입자와의 협상 전후로 하락 거래가 이어져 계약이 깨질 뻔했다”며 “세입자 자녀가 인근 학교에 다녀 쉽게 이사를 못 하는 상황이라 계약을 가까스로 연장했다”고 했다.
서울 아파트 전세 거래 5건 중 1건은 2년 전보다 낮은 가격에 계약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주인은 신규 세입자에게 받는 보증금으로는 기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모두 돌려줄 수 없어 갑자기 목돈을 마련해야 하고 세입자도 제때 보증금을 받아 이사 가기 어려워지는 ‘역(逆)전세난’이 확산되고 있다.
동아일보가 25일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과 프롭테크 기업 ‘호갱노노’의 최근 3개월간 서울 아파트 전세 거래 2만3667건을 분석한 결과 전체의 21.3%인 5050건이 2년 전보다 낮은 가격에 계약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 10월 26일부터 이날까지 신고된 전세가격과 2년 전 같은 기간의 평균 전세가격을 비교한 결과로 전세가격이 2억∼3억 원 떨어진 경우가 속출했다. 구별로는 강서구의 역전세 거래 비중이 28.1%로 가장 높았고 강동·양천(27.2%), 강북(27.1%), 영등포구(25.4%)가 뒤를 이었다.
이 같은 역전세난은 최근 전셋값이 급락한 영향이 크다. KB부동산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아파트 전세가격은 5.45% 하락해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22.41%)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송인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정보센터 소장은 “고금리로 전세대출 부담이 커지며 전세 수요가 줄고 있다”며 “주택법 개정으로 신규 입주 아파트의 실거주 의무가 폐지되고, 대단지 입주가 시작되면 역전세난이 심화될 것”이라고 했다.
“세입자가 3억 빼달래요”… 5채 중 1채 역전세 계약
서울 아파트 역전세난
집주인들, 세입자에 재계약 읍소 전세금 내린 만큼 ‘역월세’ 주기도 “전세 나가게” 수천만원 리모델링
#1. 서울 강동구 1000채 규모 단지 30평대(전용면적 84㎡) 아파트를 보유 중인 40대 박모 씨는 최근 기존 세입자와 계약을 연장하며 매달 75만 원을 세입자에게 주기로 했다. 2021년 초 9억 원이던 전셋값이 최근 6억 원으로 빠지자 세입자는 차액을 돌려 달라고 했다. 현금 3억 원을 갑자기 마련할 길이 없었던 박 씨는 절반만 돌려주되 나머지는 세입자에게 전세자금대출 이자 명목으로 주겠다고 했다. 이른바 ‘역월세’인 셈이다. #2. 40대 직장인 김모 씨는 2년 전 분양받은 서울 강남구 개포동 아파트에 올해 3월 입주하려다 포기했다. 현재 전세로 사는 서울 강서구 아파트 세입자를 못 구해서다. 보증금을 돌려받아 개포동 아파트 잔금을 치를 계획이었지만, 현 아파트 보증금이 5억 원에서 3억 원대로 떨어졌다. 집주인은 돈이 없어서 못 준다고 버텼다. 김 씨는 “보증금을 돌려받으려면 집주인에게 소송 등 강수를 써야 하는데 그 부담을 감당하긴 힘들었다”며 “개포동 아파트 세입자를 겨우 구해 잔금을 간신히 냈고 아이의 강남 전학은 2년 미루기로 했다”며 씁쓸해했다.
● 2년 전 ‘갑’ 집주인, 세입자에 갱신계약 ‘읍소’
대출금리 인상으로 세입자들이 전세보다 월세를 선호하고 전세 매물이 늘며 세입자를 구하기 힘들어지면서 전셋값이 이전보다 수억 원 하락하는 ‘역전세’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 개정 임대차법 도입 직후 전셋값이 급등하며 전세난을 겪었던 전세시장이 세입자 우위로 재편되며 집주인들이 갱신계약을 위해 기존 세입자의 전세대출 이자를 대신 내주거나 대출까지 받아 갱신계약에 나서고 있다.
서울 강남구 세곡푸르지오 전용 84㎡를 보유한 최모 씨(37)는 기존 세입자와 갱신계약을 하기 위해 보유 주식을 모두 손해 보고 처분했다. 2년 전 8억5000만 원의 보증금을 끼고 집을 샀는데 최근 전세시세가 6억5000만 원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세입자가 “5000만 원만 돌려주면 재계약하겠다”고 해서 서둘러 돈을 마련했다. 그는 “이번엔 운이 좋았는데 이대로라면 2년 뒤에는 최소 2억 원은 더 내야 해 벌써 걱정”이라고 했다.
● 세입자 모시기 ‘못 박지 말라’도 금기
세입자 구하기에 실패한 뒤 리모델링에 나서는 집주인도 있다. 서울 송파구의 준공 20년차 전용 39㎡ 아파트 주인인 김모 씨(63)는 “공인중개업소에서 리모델링을 하지 않으면 세입자를 못 구한다는 말을 들었다”며 “일단 전세퇴거자금 대출을 받아 기존 세입자 보증금을 돌려주고 이참에 수천만 원을 들여 집을 개보수하려고 한다”고 했다.
서울 마포구 1400여 채 규모 재건축 아파트의 전용 59㎡ 조합원인 장모 씨(41)는 최근 전세 세입자를 구하느라 진땀을 뺐다. 지난해 완공 전까지만 해도 전셋값이 8억 원에 달했지만 입주 후 6억5000만 원까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보증금 2억5000만 원에 월세 120만 원으로 세입자를 구했다. 장 씨는 “잔금이 모자라 1억 원을 대출받았다”며 “이사 날짜도 세입자에게 맞추고, ‘못을 박지 말라’는 특약도 못 넣었다”고 토로했다. 인근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세입자들이 집주인이 조금이라도 깐깐한 것 같으면 계약을 안 하겠다고 한다”며 “세입자가 상전이라 집을 깨끗하게 써 달라는 말도 못 꺼낸다”고 했다.
● 고금리·대단지 입주로 ‘역전세난’ 지속
전문가들은 당분간 역전세난이 이어질 것으로 본다. 고금리로 전세 수요는 줄고 있는데 서울 주요 지역에서 대단지 입주가 이어지는 데다 집주인의 신축 아파트 실거주 의무도 없어지며 전세 공급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부동산R114에 따르면 당장 다음 달 서울에서 총 6213채가 입주를 앞두고 있다. 지난해 2월 대비 2배 가까이로 많다. 특히 서울 강남권에서 8월 서초구 ’래미안원베일리’ 2990채, 11월 강남구 ’디에이치퍼스티어아이파크’ 6702채 등 올해만 1만3000여 채 입주가 예정돼 있다. 여기에 정부는 수도권 분양가상한제 주택에 적용되는 실거주 의무도 주택법을 개정해 폐지하기로 한 상태다. 신축 아파트 상당수가 전세 물량으로 나올 수 있다는 의미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역전세난 심화로 전세 회전율이 떨어지면 이사 가야 하는 세입자나 갈아타기 하려는 1주택자까지 피해를 보게 된다”고 했다.
역(逆)전세
직전 전세 계약보다 전세 보증금이 낮아진 전세. 집주인이 더 낮은 보증금으로 세입자를 구해야 하는 상황. 전세 수요 감소나 전세 공급 과다로 세입자가 쉽게 구해지지 않는 경우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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