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뭐 하고 살길래 연락 한 통 없느냐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덕질하느라 바쁘다며 내 최애 그룹 에이티즈를 아느냐고 물어본다. 이 질문에 30·40대 대부분은 모른다고 답한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초등학생이나 10·20대는 좀 낫다. 꼭 팬이 아니더라도 에이티즈가 라이브 실력과 마라 맛 퍼포먼스로 유명한 건 안다. 아예 아이돌에 관심 없다면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엔딩곡 ‘GRAVITY(그래비티)’를 에이티즈 메인보컬이 불렀다고 설명해준다.
40대 초반의 나는 여러 아이돌을 거쳐 2년 전부터 8인조 보이 그룹 에이티즈에 푹 빠져 있다. 독기 넘치는 무대 위 모습과 초등학생 무리 같은 무해한 평소 모습의 갭 차이가 매력적이다. 팬클럽 ‘에이티니’에 가입하고 지난해 10월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콘서트에도 다녀왔다. 2018년 데뷔한 에이티즈는 4세대 아이돌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그룹 중 하나다. 지난해 여름 발표한 ‘더 월드 에피소드 1: 무브먼트’를 통해 음악방송 6관왕과 ‘빌보드 200’ 3위, 첫 밀리언셀러 달성이라는 자체 최고 성과를 기록했다. 지난해 12월 30일 발표한 첫 싱글앨범 ‘스핀 오프: 프롬 더 위트니스’는 ‘빌보드 200’ 7위로 진입했으며 타이틀곡 ‘HALAZIA(할라지아)’는 발매 직후 29개국 아이튠즈 톱 송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눈부시게 성장 중이지만 여전히 에이티즈는 배가 고프다. 국내보다 해외 인기가 훨씬 높다 보니 아이돌 팬이 모이는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한국 에이티니는 ‘한줌단’(팬이 한 줌 정도밖에 안 된다는 의미) 취급을 받기도 한다. 주변의 십중팔구는 그룹명도 모르지만 음반 100만 장을 파는 에이티즈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에이티즈를 가장 잘 드러내는 근본 곡은 ‘Say My Name’과 ‘HALA HALA(할라할라)’다. 데뷔 3개월여 만에 낸 두 번째 미니앨범의 타이틀곡 ‘Say My Name’에서는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 어느새 먼 곳을 향해 더 Fly high’ 한다며 ‘내 이름은 이름은 A to the Z. 나를 불러줘’라고 노래한다.
NCT·스트레이 키즈·투바투와 god·소녀시대의 차이는?
일찍이 김춘수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고 노래했다. 아이돌 홍수 시대에는 멤버 개인은커녕 그룹명 알리기도 쉽지 않다. 톱 아이돌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투바투)’ ‘Stray Kids(스트레이 키즈)’ ‘NCT’는 국내외에서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지만 ‘god’나 ‘소녀시대’ 같은 국민 아이돌과는 결이 다르다. ‘방탄소년단 동생 그룹’이란 양날의 검이 주는 부담감을 스스로 뛰어넘은 투바투를 ‘티엑스티’로 부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무한 개방, 무한 확장을 키워드로 하는 NCT U와 NCT 127, NCT DREAM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난해 ‘빌보드 200’ 1위를 두 번 기록한 스트레이 키즈의 경우 2009년 소속사 선배 원더걸스가 미국에서 맨땅에 헤딩할 때보다 훨씬 높은 성과를 이뤘지만 아직은 국내에서 원더걸스의 인지도는 못 넘었다.
아이돌 시장이 규모는 커졌지만 그들만의 리그화하고 있다. 요즘 음악방송 평균 시청률은 대부분 1% 미만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음악에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며 채널을 돌린 적이 있다면 아이와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보길 바란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한바탕 몰아친 트로트 열풍도 관심 없는 이에겐 피로하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요즘 아이돌’ ‘K-팝 스타’로 뭉뚱그려 부르기엔 이 어린 직업인들이 더 어릴 때부터 흘린 피, 땀, 눈물이 아깝다. 일하며 아이돌을 가까이에서 살필 기회가 많았다. 밤낮 상관없이 높은 텐션으로 카메라 앞에서 웃었지만, 대부분은 한두 시간씩 쪽잠을 자고 배달 음식으로 식사하거나 그나마도 다이어트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그래도 “무대에 설 때 행복하다”며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자식을 낳으면 아이돌은 시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말리지 않아도 아이돌로 데뷔하기란 쉽지 않다. 데뷔 후 성공하기는 더 어렵다. 에이티즈가 데뷔한 2018년만 해도 유닛을 포함해 총 60개의 그룹이 세상에 나왔다.
화려한 무대 아래 뜨기 위한 물밑 발길질
그나마 대형 기획사 아이돌은 사정이 조금 낫다. 대형 기획사는 연습생으로 발탁되고 최종 데뷔조까지 확정되는 과정이 촘촘한 대신 풍부한 자본과 인력, 패밀리 팬덤을 바탕으로 한발 앞선 채 출발할 수 있다. 새해 첫날 블랙핑크 이후 7년 만의 걸그룹 ‘BABYMONSTER(베이비몬스터)’ 론칭 소식을 알린 YG의 경우 다음 날 주가까지 상승할 만큼 큰 화제가 됐다. 화제성에 노래와 안무, 콘셉트까지 뒷받침된다면 하이브 산하 레이블 어도어 소속의 걸 그룹 ‘뉴진스’처럼 데뷔 2개월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기적도 가능하다.
중소 기획사는 이름을 알리려면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중소 기획사 연습생이 주로 찾는 지름길은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예전에 비해 인기가 한풀 꺾이긴 했지만 2021년 엠넷 ‘걸스플래닛999: 소녀대전’에서 선발되어 데뷔한 케플러의 성공은 왜 아직도 오디션 프로그램이 제작되는지 보여준다. 9인조 한중일 합작 프로젝트 걸 그룹인 케플러는 최근 발표된 일본 ‘오리콘 연간 랭킹 2022’ 아티스트별 세일즈 부문에서 신인 랭킹 1위를 차지했다.
이미 데뷔한 그룹도 저마다의 간절한 이유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2017년 데뷔한 더보이즈는 엠넷 서바이벌 ‘로드 투 킹덤’(2020)에서 우승하고 ‘킹덤: 레전더리 워’(2021)에서 준우승하며 성장에 가속도가 붙었다. 올 2월 첫 전파를 타는 JTBC ‘피크타임’은 아예 ‘망한 아이돌’ 꼬리표를 단 그룹들이 팀 대결을 벌인다. 우승 그룹에게는 슈퍼주니어 규현, 하이라이트 이기광 등 아이돌 선배부터 SM의 퍼포먼스 디렉터 심재원, 프로듀서 라이언 전 등의 조언을 통해 글로벌 보이 그룹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인생 역전의 기회가 주어진다.
기회는 왔을 때 무조건 잡아야 한다. 국내든, 해외든 어디라도 먼저 터진 곳에서 파이를 키우고 그 화제성으로 다른 쪽 파이를 키우면 된다. 애초 에이티즈가 해외를 공략해 태어난 그룹은 아니다. 전원 한국인으로 팀을 이루고 유학생 출신의 외국어 담당 멤버가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저 실력을 먼저 알아본 해외에서 조금 더 크게 투어를 돌고 열심히 벌어 다시 좋은 음악을 만들 뿐이다. 그래서 에이티즈는 짧고 굵게 국내 활동을 마치고 올 2월 유럽 투어를 떠난다. 해외 팬들의 넘치는 사랑 듬뿍 받고 얼른 ‘내한’하길 기다리면서 덕질에 쓸 총알을 열심히 모아야겠다. 부디 다음 컴백 때는 에이티즈를 아느냐는 내 질문에 안다는 ‘머글’(‘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마법사가 아닌 일반 인간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한 일반인을 뜻하는 덕후 용어)이 늘어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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