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가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 최고 부자가 바뀌었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를 제치고 세계 최고 부자에 등극한 것이다. 2022년 12월 13일(현지 시각) 블룸버그가 발표한 억만장자 지수에 따르면 아르노 회장은 순자산 1708억 달러(약 222조 원)를 보유해 1640억 달러(약 213조 원)의 머스크를 2위로 밀어냈다.
아르노 LVMH 회장의 세계 최고 부자 등극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경제 산업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아르노 회장은 2012년 이 지수가 개발된 이후 1위에 오른 다섯 번째 인물이다. 그에 앞서 멕시코 통신 재벌 카를로스 슬림,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등이 1위에 올랐다. 명품 업계 수장은 아르노 회장이 처음이다. LVMH는 루이비통과 디올, 티파니 등을 비롯해 화장품, 호텔, 시계 등 다양한 업계의 브랜드 75개를 소유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으로 2019년과 2020년 매출이 잠시 주춤했지만 이후 계속 성장세다.
다른 명품 브랜드들의 매출도 폭풍 성장 중이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에르메스의 지난해 3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4% 증가한 31억4000만 유로(약 4조4000억 원)였다. 구찌와 발렌시아가를 소유한 2위 명품 기업 케링의 매출도 같은 기간 14% 늘어난 51억4000만 유로(약 7조4000억 원)를 기록했다. 미국 글로벌 컨설팅 업체 베인앤드컴퍼니는 올해 글로벌 명품시장이 3∼8% 몸집을 키우고, 오는 2030년까지 60%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취향 과시 현상으로 일상이 된 명품
코로나19 팬데믹이 남긴 고물가·고금리·고환율 3고(高) 속에서 여전히 반도체, 자동차, 2차전지 대형주들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반면 명품시장은 코로나19 이전 컨디션으로 회복한 것은 물론 지난해에만 약 22% 성장했다.
전문가들은 명품시장의 선전에 대해 보복 소비부터 명품 소비층의 확대, 취향을 과시하는 시대상의 변화까지 복합적인 분석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명품시장이 양적으로 성장하면서 소비 형태도 다변화하고 있다.
이는 명품의 세계가 넓고도 심오한 덕분이다. 지갑을 열게 만드는 품목도, 브랜드도 무궁무진하다. 불황이 심화하면서 값비싼 백 대신 구두, 지갑, 향수, 화장품, 생활용품 등에 투자하는 ‘스몰 럭셔리’ 소비가 증가하는가 하면, “나는 좀 다르다”는 MZ세대를 중심으로 루이비통, 샤넬 같은 전통적인 명품 브랜드 대신 아미, 메종키츠네, 사카이 같은 새로운 명품 브랜드가 뜨고 있다. 아예 명품 마니아들은 전 세계 몇 점 없는 초고가 한정판을 택하거나 명품 중의 명품 ‘울트라 하이엔드’ 브랜드를 찾기도 한다.
특히 눈에 띄는 변화는 젊은 소비자의 등장이다. 온라인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명품시장의 큰손으로 떠오르면서 ‘매치스패션’ ‘마이테레사’ ‘파페치’ 등의 해외 직구 사이트, ‘베스티에르콜렉티브’ 같은 글로벌 패션 리세일 플랫폼이 급성장하고 있다.
명품시장에 이 같은 변화의 물결이 일자 오프라인 매장에 집중하며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던 럭셔리 브랜드도 다양한 실험에 나섰다. 지난해 9월 발렌시아가는 화이트 라벨 재판매 플랫폼 ‘리플런트’와 손잡고 리세일 시장에 뛰어들었다. 화이트 라벨링은 상품을 만드는 회사와 별도로 유통과 판매를 맡은 회사가 자사의 브랜드를 붙여 파는 것을 뜻한다. 고객이 자신이 갖고 있는 발렌시아가 의류나 액세서리 등을 특정 발렌시아가 매장에 가져가면 리플런트에서 사진, 인증, 평가 절차를 거쳐 ‘트레이더스’와 베스티에르콜렉티브 등 2차 리세일 플랫폼을 통해 판매하는 식이다.
브랜드 경험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도 이뤄지고 있다. 구찌는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오너 셰프인 마시모 부트라와 협업해 글로벌 마케팅 거점에 레스토랑을 오픈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플래그십스토어에 있는 ‘구찌 오스테리아 서울’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생긴 구찌 레스토랑이다. 이 외에도 디올, 루이비통, 슈즈 브랜드 지미추 등은 브랜드 정체성을 잘 살린 감각적인 팝업스토어로 ‘인증 샷’ 세대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인터넷의 발전으로 그간 알려지지 않은 세계 각국의 명품 브랜드에 대한 정보를 보다 쉽게 얻고 온라인으로 직접 구매할 수 있게 됐다”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SNS에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것이 달라진 명품 소비 행태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잇따른 가격 인상에도 성장세 유지될 듯
한편 연초 명품 업계는 줄줄이 주요 인기 품목의 가격을 인상했다. 해외여행이 늘면서 세계적으로 보복 소비가 줄고 명품시장도 타격을 받을 것이란 일각의 전망에서 벗어나는 행보다. 장 자크 기오니 LVMH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지난해 10월 컨퍼런스콜에서 “명품은 일반 경제를 따르지 않는다”며 가격인상에도 수요가 견고할 것으로 예상했다.
비쌀수록 잘 팔린다는 ‘베블런 효과’가 입증되다 보니 최근에는 불황 속 재테크 수단으로도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중국 정부가 부동산 통제 정책으로 시장을 압박하자 중국 부자들은 여분의 현금으로 주택을 구입하는 대신 롤렉스·파텍필립 등의 명품 시계에 투자했다. 들쭉날쭉한 부동산시장과 비교해 명품의 클래스는 영원하고 환금성도 우수하기 때문이다.
‘명품’은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며, 상품 가치와 브랜드 가치를 모두 인정받은 고급품을 일컫는 말이다. 게다가 2023년의 명품은 단순 고급품을 넘어 ‘나’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매개체이자 자신을 위한 선물이며 투자처로 이용되고 있다.
이 교수는 “어차피 초고소득층은 경기의 영향을 받지 않고, 무작정 소비를 참다 보면 터지는 지점이 있다”며 향후에도 명품시장의 성장세가 유지될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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