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비둘기 파월’(연준 의장)을 따라 ‘비둘기 이창용’(한은 총재)도 날아오를지 주목된다.
글로벌 침체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미국의 금리 인상 종료 기대감이 확산하면서 시장에서는 2월 한국은행 기준금리가 동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지난달 물가 상승률이 5.2%로 확대되고 연이은 전기·가스요금 인상에 2월마저 5% 내외의 높은 물가 오름세가 예고됐다. 섣부른 동결이 자칫 물가 대응 실기로 이어질 수 있단 부담감이 금리 동결의 걸림돌로 작용할 전망이다.
◇‘연준 굴레’ 벗은 한국…국내 상황 중요성↑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는 지난 1일(현지시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4.50~4.75%로 0.25%포인트(p) 인상했다.
연준은 그간 40년 만의 최악 물가 상승에 대응해 금리를 공격적으로 인상해 왔다. 지난해 6월부터 기준금리를 한 번에 0.75%p씩 올리는 ‘자이언트 스텝’을 4차례 연속으로 단행했고 12월에는 속도를 딱 한 템포 늦춰 ‘빅 스텝’(0.50%p 인상)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통상적인 ‘베이비 스텝’으로 뚜렷이 감속하는 모습을 보였다.
연준의 감속은 미국 금리 인상 종료의 징조처럼 해석됐다. 김성수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시동을 끄기 전에는 속도부터 줄여야 한다”며 “오는 3월 0.25%p 인상을 끝으로 미국의 금리 인상 사이클이 종료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장에서는 한은도 연준을 따라 금리 인상 종료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졌다.
오창섭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금리 인상은 이미 끝났다”라며 “2월 한은은 향후 상황을 보겠다며 금리를 동결할 가능성이 높고 사실상 그것으로 이번 인상기는 끝”이라고 말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도 “동결을 예상한다”며 “한은은 이번에 경기 쪽에 좀 더 무게를 둘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실 연준의 감속 자체만 본다면 한은의 기준금리 동결 가능성은 일단 높아졌다고 봐야 한다.
만일 연준이 기존의 금리 인상 속도를 이어가 이번에도 빅 스텝을 단행했다면 한미 간 기준금리 역전 폭은 기존 최대치인 1.50%p에 달했을 것이다. 이 경우 한은은 최대 역전 폭을 경신할 수 없다는 부담감에 ‘키 맞추기’ 금리 인상 압력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현재 한미 간 기준금리는 1.25%p 격차로 역전돼 있다. 이상적인 상황에서 한국의 금리는 미국보다 높아야 한다. 글로벌 최대 선진국인 미국보다 위험도가 높은 한국에 투자하려면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는 것이 통상적인 지식이다.
결국 한국 입장에서는 미국의 금리 인상 종료 기대가 향후 역전 확대에 대한 우려를 낮춰 ‘미국으로부터 자유로운, 국내 상황에 기초한 결정’을 이끄는 셈이다.
◇경기는 이미 ‘위기 수준’…금리 인상 무게 커
그렇다면 지금 국내 상황은 어떤 상태일까. 기준금리를 연 3.50%에서 인상하는 데 따른 비용을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우선 경기가 문제다. 지난 4분기 우리 경제는 -0.4% 성장하면서 코로나19 이후 2년 반 만에 첫 역성장을 기록했다.
올해 연간 경제 성장률은 작년 말 한은이 1.7%, 정부가 1.6%로 전망했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낮은 1%대 초중반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여러 기관들 사이에서 쏟아지고 있다.
경제학적으로 금리 인상은 자금 조달 비용을 높이고 소비·투자를 위축시켜 경기를 악화시킨다. 실제로 작년 말 한은은 기준금리가 0.25%p 오를 경우 향후 1년간 경제 성장률이 0.06~0.07%p 낮아진다고 추산한 바 있다.
우리 경제가 연 2%보다 낮은 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대형 경제 위기가 터진 몇몇 해를 빼고는 없다. 그런데 연 1%대 중반 성장마저 위태로운 현 상황에서 기준금리 추가 인상으로 더 찬물을 뿌리는 일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이 밖에도 부동산 경기 냉각과 그에 따른 소비 부진 우려, 대출 연체율 상승 등 가계부채 문제, 기업 자금 조달 악화 등이 금리 인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비용이다.
◇좀체 안 식는 물가 걸림돌…“2월도 고물가”
그렇다고 금리 동결이 경제 비용을 최소화할 만능 방패는 아니다. 금리 동결의 경우 물가가 문제가 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2%로 전월(5.0%)보다 높았다. 물가 오름세가 석 달 만에 다시 확대된 것이었다.
이 같은 오름세 확대는 공공요금 인상 영향이 지대했다. 지난달 전기·가스·수도는 1년 전보다 28.3% 급등해 별도 통계 작성을 시작한 2010년 이래 최고치를 경신했다.
애당초 미국은 최근 물가 오름세가 약해지면서 금리 인상 종료 기대감이 확산한 것인데 한국은 오히려 연초부터 반대 흐름이 나타난 셈이다.
심지어 한국의 물가는 난방비 등 공공요금 인상에 따라 이달도 높은 수준을 이어갈 것으로 분석됐다. 한은은 “소비자물가가 2월에도 5% 내외 상승률을 나타낼 것”이라고 밝혔다.
비록 한은은 1월 물가 상승률이 “예상한 수준”이라고 했지만, 기조적 물가 흐름을 보여주는 근원물가(농산물 및 석유류 제외 지수)는 5.0% 올라 전월(4.8%)보다 상승 폭이 확대됐고 또 다른 근원물가인 식료품 및 에너지 제외 지수는 전월과 동일한 4.1% 올랐다.
중앙은행의 제1 설립 목적이 물가 안정임을 고려했을 때 한은이 금리 인상으로 경제 주체들에게 물가 상승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고 ‘고물가의 고착화’를 막아야 한다고 판단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팽팽 압력에 금통위 ‘양분’…총재 최종 결정 가능성도
이처럼 성장과 물가 사이 중요도의 무게는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쏠리지 않고, 균형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대외 요인조차도 금리 인상과 동결 중 어느 한쪽을 편들고 있지 않다. 예컨대 중국 경기가 반등할 것이라는 전망에 따라 최근 경제 성장에 대한 우려는 한시름 덜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하지만 중국발 수요 증대에 물가 상승 압력이 확대될 우려도 있어 아직 물가와 성장 사이 어느 쪽의 압력이 우세해진 상황은 아닌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기준금리를 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 위원들의 의중도 거의 3 대 3으로 갈린 모습이다.
한은이 지난달 31일 공개한 금통위 의사록(1월13일 개최)을 보면 이창용 총재를 제외한 금통위원 6명 가운데 2명은 기준금리 동결을 주장했으며, 1명은 향후 물가 둔화세를 전제로 금리 인상에 신중할 것을, 나머지 3명은 성장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 인상을 지속하자는 의견을 내비쳤다.
일각에선 이창용 총재가 캐스팅 보트(casting vote·최종 결정권)를 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내놓는다.
한은 총재는 금통위에서 3 대 3으로 의견이 나뉘었을 때에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 최종 결정권을 행사한다. 지난 1998년 한은 총재가 금통위 의장을 맡은 이후 금리 결정에서 캐스팅 보트를 행사한 사례는 2001년 7월, 2006년 8월, 2013년 4월 등으로 손에 꼽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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