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운전하는데 안개가 가득해 어느 방향으로 갈지 모르면 차를 세우고 안개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23일 통화정책방향 결정회의가 끝난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한 이번 결정의 배경을 이같이 비유했다. 그만큼 시장에 불확실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컸다고 설명하며, 이 총재는 이번 금리 동결이 특히 ‘물가 경로’를 확인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은이 경기 침체 우려로 금리를 동결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금리 인상을 통해 가길 원하는 ‘물가 경로’”라며 “3월부턴 물가가 4%대로 낮아지고 올해 말에는 3%대 초반으로 내려가는 경로를 예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굳이 금리를 올려 긴축적으로 가기보다는 지금 수준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물가 경로로 가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미 연방준비제도의 긴축 기조 등 외부 압력에도 불구하고 한은이 7연속(2022년 4·5·7·8·10·11월, 2023년 1월) 금리 인상에 ‘브레이크’를 건 데는 경기 침체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풀이한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은 경기 침체 징후를 보이지 않는 반면에 한국은 이미 경기 침체 국면에 들어섰다”며 “가계대출과 중소기업대출 비율이 높은 한국은 급격한 금리 인상에 따른 부작용이 큰 탓에 이번에는 동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은은 이날 발표한 수정경제전망에서 올해 연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7%에서 1.6%로 낮췄다. 지난해 4분기(10∼12월) 한국 경제가 ―0.4% 뒷걸음친 데 이어 올해 1분기(1∼3월)에도 역성장 가능성이 나온다. 그 경우 2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기술적 경기 침체’에 빠지게 된다. 수출이 이달까지 5개월 연속 감소할 것으로 우려되는 데다 이달 소비자심리지수도 전월 대비 0.5포인트 하락하는 등 민간 소비도 위축되고 있다.
다만 이 총재는 “금번 기준금리 동결을 ‘금리 인상 기조가 끝났다’란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물가 안정에 중점을 두고 상당 기간 긴축 기조를 이어가면서 추가 인상 필요성을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상당 기간이란 표현은 예상한 물가 경로가 정책 목표인 2%로 간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라며 “그 전에 금리 인하를 논하는 건 시기상조”라고 했다. 올해 말 물가 상승률이 3% 수준으로 예상되는 만큼 연내 ‘피벗(pivot·정책 전환)’은 없을 것이란 뜻으로 읽힌다.
연준의 추가 금리 인상이 확실시되는 가운데 벌어지는 한미 금리 차도 한은에 부담일 수밖에 없다. 한은의 기준금리 동결로 한미 금리 차는 1.25%포인트로 유지되고 있지만 연준의 행보에 따라 최대 2%포인트까지 확대될 수 있다. 신관호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가장 큰 우려 사항은 환율 불안정성”이라며 “한미 금리 차가 벌어져 다시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물가 안정을 저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총재는 한미 금리 차와 관련해 “변동환율제 아래에서 적정 수준은 없고 기계적으로 어느 정도가 위험하거나 바람직한 것도 없다”면서도 “환율 쏠림 현상이 있거나 변동성이 커지면 금융 시장과 물가 영향 등을 고려해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은이 ‘숨 고르기’ 이후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되는 가운데 한국경제연구원은 ‘2023년 기준금리 예측과 정책 시사점’ 분석 보고서를 통해 금리가 상반기(1∼6월) 3.75%, 연말 3.75∼4.0% 수준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금리 인상 가능성이 있지만 국내 실물경제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인상 폭이 제한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은 것이다.
이날 기준금리 동결에도 원-달러 환율은 전날보다 7.8원 내린 1297.1원으로 마감하며 1300원 선 밑으로 떨어졌다. 코스피와 코스닥지수는 각각 0.89%, 0.61%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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