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대로 유지된다면 국민연금은 2041년부터 적자로 돌아 2055년 고갈된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행정부와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가 가동돼 연금개혁 논의를 진행하는 이유다. 하지만 시작 단계부터 순탄치 않다. 당초 1월 말로 예정됐던 연금특위 소속 민간자문위원회(민간자문위)의 연금개혁 보고서 초안 제출이 2월 말로 연장된 데 이어 다시 3월로 미뤄졌다. 자문위원 간 이견 차를 좁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쟁점이 된 것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생애 평균 소득 대비 연금 수령액 비율)이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1998년 1차 연금개혁 이후 기준소득월액의 9%로 고정돼 있다. 소득대체율은 1988년 연금 가입 기간에 받은 평균 월급 대비 70%(40년 가입 기준)로 출발했지만 이후 두 차례 하향 조정을 거쳐 2007년부터 해마다 0.5%p씩 낮춰 2028년 40%에 맞추는 것으로 고정됐다. 단순히 국민연금 재정 안정이 목적이라면 보험료율을 올리고 소득대체율을 내리면 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인 노인 빈곤율을 낮추기 위해서는 소득대체율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 맞선다.
연금 고갈 불러온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소득대체율을 올리고 내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공적연금인 국민연금은 사적연금인 개인연금과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사적연금은 내가 부은 돈이 모두 나를 위해 적립되지만 공적연금은 내가 부은 돈이 윗세대 부양에 쓰인다. 내 미래는 다음 세대가 책임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은 앞 세대를 부양하는 뒤 세대 인구가 적정 수준으로 유지돼야 문제없이 작동된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정반대다. 최근 통계청 집계에 따르면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인 합계출산율이 0.78명이다. 반면 0세 출생자가 앞으로 생존할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기대수명은 83.6세다. 과거에는 청년 여러 명이 노인 1명을 부양했지만 앞으로는 청년 1명이 노인 여러 명을 부양하는 시대가 올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문위원들도 보험료율 상향에는 이견이 없었다. 기존 9%에서 15%까지 단계적 인상안이 나왔다. 여기서부터 의견이 갈렸다. 국민연금 재정 안정과 노후 소득 보장 가운데 재정 안정에 방점을 찍은 이들은 보험료율은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기존대로 2028년까지 40%까지 낮추자는 입장이었다. 반면 노후 소득 보장에 초점을 맞춘 이들은 보험료율을 15%로 올리는 만큼 소득대체율도 50%로 올리자고 주장했다. 급기야 보험료율 15%, 소득대체율 45%라는 중재안도 나왔지만 합의를 보지는 못했다.
모수개혁에서 구조개혁으로
처음 연금개혁 논의는 보험료율이나 소득대체율, 연금 수령 연령 등 연금체계의 여러 요소를 조정하는 모수개혁에 맞춰졌다. 하지만 1월 말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5%까지 올리는 것을 전제로 한 연금개혁 초안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나오면서 논란이 일자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직접 브리핑을 열고 “15% 단계적 인상 방안은 정부안이 아니다”라며 “향후 국회 연금특위에서 개선 방안이 마련되면 해당 내용을 참고해 국민 의견을 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2월 8일 국회 연금특위 여야 간사도 “구조개혁이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며 논의를 전환시켰다. 그러면서 “(보험료·소득대체율 조정은) 정부가 10월 국민연금 종합 운영 계획을 내면 국회가 받아서 최종 결정할 사안”이라고 했다. 구조개혁은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퇴직연금, 직역연금 등 연금체계 전반을 조정하는 더 방대하고 어려운 작업이다. 김연명 민간자문위 공동위원장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모수개혁이 집을 수리하는 것이라면, 구조개혁은 집을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결국 3월 국회 연금특위에 제출될 민간자문위 보고서는 연금개혁 보고서 초안이 아니라, 그동안 논의된 내용을 취합한 보고서 형태가 될 전망이다. 보고서는 연금개혁 관련 총 8개 분야에 공동위원장인 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와 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제외한 14명의 자문위원이 각각 집필한 내용을 취합해 만들어지며 소득대체율·보험료율, 가입·수령 연령 조정, 사각지대 완화 방안, 기초연금·직역연금·퇴직연금 등 연금제도 전반에 관한 정책 제안이 담긴다. 또 국회 연금특위가 “모수개혁 대신 구조개혁에 집중해달라”고 당부한 만큼 보험료율이나 소득대체율에 대한 구체적인 수치는 담기지 않는다. 그 대신 ‘노후 소득 보장론’ ‘재정 안정 강화론’이라는 이름으로 구체적인 수치를 명시하지 않은 연금개혁 방법론이 제시될 전망이다. 국회 연금특위 활동은 4월까지로 제한돼 있어 이후 운영 여부는 불투명하다.
한편 조규홍 장관은 올해 초 국민과 소통을 통해 10월까지 연금개혁안을 만들어내겠다고 발표했다. 조 장관은 당시 “국민이 내는 보험료율이 OECD 평균의 절반이라서 보험료율 인상 필요성이 제기된다”며 “매달 받는 연금액이 평균 60만 원이 안 돼 용돈 연금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노인 빈곤율은 OECD 최고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재정적 지속가능성을 제고하고 젊은 세대와 노후 세대 간 공정성을 제고해야 한다”면서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전문가 의견을 경청하고 국민과 적극적으로 소통해 국민과 함께 국민의 개혁안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지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출산율이 높은 고도성장기에 맞는 제도”라고 한다. 한국이 국민연금을 도입한 1988년은 경제성장률이 12%에 달하고 인구도 4000만 명을 넘어 5000만 명을 향해 가는 때였지만 이제는 더는 장점이 없다는 것이다. 연금개혁 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보다 먼저 고도성장기를 지나온 선진국 모두 연금개혁을 둘러싼 갈등을 겪었거나 겪고 있다.
선진국도 연금개혁 둘러싸고 진통
“연금제도를 유지하고 싶다면 우리는 더 오래 일해야 한다”. 연금개혁을 추진 중인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월 21일(현지 시간)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프랑스 전역에서 연금개혁에 반대하며 파업이 일어나고 있지만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프랑스도 최근 베이비붐 세대가 잇따라 은퇴하면서 연금 수령액이 늘어나 연금 적자폭이 커지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추진하는 연금개혁안은 현 62세인 정년을 2030년 64세로 올려 연금 수령 개시 시점을 늦추는 것이 핵심이다. 그 대신 최소 연금 수령액은 최저임금의 75%에서 85%로 올리고, 연금 100% 수령을 위해 필요한 근속 연수를 42년에서 2027년 43년으로 높인다는 계획이다. 프랑스 연금개혁안은 3월 2일부터 12일까지 상원 검토가 이뤄진다. 상원 통과에 실패하면 프랑스 정부는 헌법 제49조 3항을 발동해 표결 절차 없이도 법안을 처리할 수 있다.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가 최근 내놓은 보고서 ‘고령사회 선진국들의 공적연금 개혁 사례와 시사점’에 따르면 선진국은 보험료율 인상, 연금 수령 개시 연령 상향, 연금 급여 감액 등 모수개혁에 초점을 맞춰 연금개혁을 했다. 보험료율 인상으로 적립 부담은 늘고 연금 수령액은 줄어 노후 소득 보장 기능이 약화되자, 저소득층을 위한 기초연금 강화와 일반 국민에 초점을 맞춘 사적연금 장려 정책으로 이를 보완했다. 영국은 2012년부터 사용자를 대상으로 모든 근로자의 연금계좌 개설을 의무화했으며 네스트(NEST·National Employment Saving Trust) 제도를 통해 정부가 기여금을 보조하는 방식으로 사적연금 활성화를 지원했다. 독일도 정부가 기여금을 보조하는 방식을 도입한 사적연금으로 리스터 연금(Riester Rente) 제도를 신설했다.
정원석 보험연구원 연구위원도 최근 ‘초고령사회를 대비한 공사적연금 정책방향’ 세미나에서 공·사적연금의 상호보완적 필요성을 강조했다. “국민연금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더 내고 덜 받는’ 또는 ‘더 내고 동일하게 받는’ 방향으로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적정한 수준의 노후 소득 보장을 위해 공적연금 부족분을 사적연금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난해 11월 기준 국민연금 가입자는 2229만여 명이며, 급여 수급자는 636만여 명이다. 그중 20만~60만 원을 받는 수급자가 390여 만 명으로 가장 많다. 올해 63세인 국민연금 수령 개시 연령은 2028년 64세, 2033년 65세로 5년마다 한 살씩 늦춰지게 설계돼 있다. 모수개혁 논의 가운데는 연금 수령 개시 연령 상향안도 있는데 연금개혁 방안으로 구체화되면 이 또한 정년 연장 논란과 맞물려 파장을 일으킬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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