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이모 씨는 최근 동료들과 서울 서초구 고깃집에 갔다가 오후 10시도 안 돼 쫓겨나다시피 나와야 했다. 종업원이 마감이라고 수차례 주의를 주더니 오후 9시 반부터 주문을 아예 안 받았다. 그는 “과거엔 당연했던 자정 영업이 이젠 옛말이 됐다”고 했다.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던 ‘야간공화국’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야간 손님이 줄어든 데다 가스비 전기료 인건비 재료비 등이 일제히 급등하며 일찍 문을 닫는 가게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가 13일 종합 광고대행사 SM C&C와 20∼60대 전국 성인 남녀 1552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귀가 시간이 코로나19 이전보다 하루 평균 67.6분 빨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 이후 저녁 약속을 1차에서 끝낸다는 응답도 70.9%로 2차(24.7%)나 3차 이상(4.4%)보다 현저히 많았다.
“야간영업 할수록 손해”… 손님 줄고 비용 치솟자 가게 문 일찍닫아
불야성 ‘야간공화국’ 점차 사라져
식당 운영시간 오후 10시면 종료 24시간 영업 편의점 비중도 줄어 손님은 음식값-택시비 올라 부담 “오후 9시 이전 모임 끝나” 37%
대구 중구 교동에서 술집을 운영했던 남효민 씨(35)는 이달 초 가게를 접었다. 코로나19만 넘기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매출은 제자리걸음이었다. 특히 밤 12시가 지나면 손님 발길이 뚝 끊겼다. 그는 “코로나19 이전엔 오후 10시에도 손님이 (새로) 들어왔는데 지금은 오후 10시에 들어오는 2차, 3차 손님이 반 이상 줄어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며 “주변 주점들도 새벽 영업을 안 하는 고깃집이나 횟집으로 업종을 많이 바꾼다”고 말했다.
엔데믹을 맞이한 지 1년 가까이 됐지만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불야성을 이루던 도심 불빛이 쉽게 켜지지 않고 있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저녁 모임이 있어도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챙기며 오후 9시 전 귀가가 뉴노멀로 자리잡은 데다 치솟는 인건비, 운영비 등이 맞물리며 영업시간을 줄이는 업장이 늘었기 때문이다.
● 1차에서 끝내는 손님들, 문 닫는 24시간 상점들
직장인 이모 씨는 최근 회사 동료들과 서울 종로구 전골집을 2차로 찾았다가 술자리 흥이 오르기도 전에 나와야 했다. 가게에서 오후 10시에 마감한다며 손님들을 모두 내보냈기 때문. 이 씨는 “7만5000원짜리 전골을 시켰는데 건더기만 몇 개 건져 먹고 3차 갈 식당도 주변에 없어서 바로 파했다”며 “술자리 문화가 확 바뀌었다”고 했다.
야간 영업 단축은 최근 업종을 불문하고 확산되고 있다. 이마트는 다음 달부터 전국 점포의 영업 종료 시간을 오후 11시에서 오후 10시로 1시간 앞당길 예정이다. 오후 10시 이후 매장을 찾는 고객 비중이 2020년 4.4%에서 2022년 3.0%로 줄었기 때문이다. 매장 매출액은 오후 2∼6시 ‘피크타임’에 40∼50%가 몰렸다. 24시간 운영이 당연시되던 편의점조차 영업 시간을 줄이고 있다. 편의점 GS25에 따르면 야간 미운영점 비율은 2018년 13.6%에서 2022년 19.0%로 높아졌다.
심야 영업이 줄어드는 건 코로나19 이후 확산된 이른 귀가 문화에 인플레이션 등이 더해진 영향이 크다. 동아일보와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프로’가 전국 20∼60대 155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공동 설문에서 3명 중 1명(36.7%)은 저녁 모임을 해도 오후 9시 이전에 끝낸다고 답했다. 5명 중 2명(40.7%)꼴로 10명 이상이 참석하는 단체 모임도 최근 1년간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답하는 등 최근 1년간 단체 모임이 2회 이하였다는 응답자가 76.8%나 됐다.
응답자들은 저녁 모임을 일찍 끝내는 이유(복수 응답)로 △다들 일찍 파하고 귀가하는 분위기라서(49.0%) △물가가 너무 올라 2, 3차 가기 부담스러워서(32.3%) △더 늦게 끝나면 택시 잡기 어려워서(18.5%) 등을 꼽았다. 30대 직장인 김모 씨는 “예전엔 서울시청에서 경기 수원 집까지 택시비가 3만 원 안팎으로 나왔는데 요새는 4만 원대로 뛰었다”며 “대중교통 막차 끊기기 전에 무조건 일어선다”고 했다.
● “세상 바뀌었다… 야간 영업은 할수록 손해”
심야 활동 인구가 줄며 야간 영업은 할수록 손해 보는 장사가 됐다. 경기 성남시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김모 씨는 ‘24시간 영업’을 포기했다. 영업시간 내내 불을 밝혀야 하고 전자레인지, 치킨 튀김기, 고구마 보온기 등 부대 설치물이 많아 전기료 부담이 큰데 최근 월 전기료가 70만 원에서 90만 원으로 올랐기 때문이다. 김 씨는 “인건비, 전기료, 임차료 등을 감안하면 24시간 운영은 오히려 마이너스”라며 “오전 8시부터 다음 날 오전 1시까지만 문을 연다”고 했다.
서울 서대문구 한 사우나의 경우 올해 1월 가스비가 980만 원으로 지난해 1월(350만 원)의 3배 가까이로 뛰었다. 여기에 인건비까지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2018년 7530원이던 최저임금은 2023년 9620원으로 28% 가까이 뛰면서 직원들 시급도 덩달아 올렸다. 한 술집 사장은 “야간 손님은 줄었는데 인건비는 올라 새벽에 직원들이 3∼4시간씩 사실상 놀다가 퇴근하는 일이 반복됐다”며 “오전 3시에서 오전 1시로 마감 시간을 당겨봤지만 그래도 손해여서 결국 장사를 접었다”고 했다.
지방 주유소 대부분은 야간 영업 없이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영업 중이다. 기존엔 오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문 여는 경우가 많았다. 한 주유소 관계자는 “지방은 야간에 유동인구가 뚝 끊기는데 차량 한두 대만 바라보고 종업원을 쓸 순 없다”며 “야간 운영을 줄이고 사장이 일하며 인건비를 줄인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24시간 공화국’을 유지하던 사회·문화적 기반이 완전히 달라진 만큼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기 쉽지 않을 것으로 진단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코로나19라는 강력한 외부 충격으로 초 단위의 ‘긱 노동’, 하루 단위 물류센터 근무, 재택근무와 워케이션(Workation·일과 휴가의 병행)이 확대되면서 생활 방식이 달라졌다”며 “회식 등 야간 문화를 지탱하던 큰 축이 사라지며 심야영업 문화가 급변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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