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전속결이네요. 크레디트스위스(CS)가 스위스 경쟁 은행인 UBS에 인수됐다는 소식 다들 들으셨죠? 역사가 167년짜리 은행이 고작 32억3000만 달러(약 4조원)에 경쟁업체에 팔렸으니, 굴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도 파산해서 빚잔치하게 되는 지경엔 이르지 않았으니(그랬으면 그건 금융위기의 시작)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CS 몰락의 직접적인 트리거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 파산사태입니다. 은행권 불안감이 높아지면서 가장 약한 고리였던 CS가 무너진 건데요. 그렇다고 남 탓만 할 순 없는 게, 신뢰와 안전의 상징이었던 스위스 은행의 명성에 금이 가도록 자초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CS는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들여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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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2021년을 들여다 볼까요. 크레디트스위스(CS) 주가 차트를 보면 2021년부터 줄곧 내리막인데요. 이전부터 잠재해있던 부실이 그해 폭발했기 때문입니다. 2021년 3월 두가지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린실 파산과 아케고스 마진콜 사태.
그린실 캐피탈(Greensill Capital)은 영국의 핀테크 업체인데요. 전문용어로는 ‘공급망 금융’ 즉, 일종의 ‘어음깡(외상매출채권 할인)’을 온라인으로 해주는 기업이었습니다. 소프트뱅크 비전펀드가 투자하고, 창업자가 영국 여왕 훈장까지 받은 잘 나가는 스타트업이었죠.
CS는 그린실을 팍팍 밀어줬습니다. CS가 그린실의 자산유동화증권에 투자하는 ‘공급망 금융 펀드’를 내놨는데, 이게 히트를 쳤거든요. 2017년부터 4개 펀드를 내놔서 100억 달러어치나 팔았습니다. ‘초저금리 시대의 안전한 투자 대안’이란 CS의 마케팅에 유럽 부자들이 기꺼이 투자금을 맡겼죠.
그린실이 위험해보인다는 경고는 CS 내부에서 줄곧 나왔습니다. 하지만 수익에 눈 먼 CS는 펀드 판매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코로나가 닥쳤고, 거래 기업 부도가 잇따르면서 그린실은 위기에 처합니다. CS 펀드에서도 투자금이 빠져 나갔고요. 결국 CS는 ‘투자 동결’을 선언했고 그린실은 2021년 3월 8일 파산했죠. CS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을 뿐 아니라, ‘부자 자산관리’의 강자라는 명성에도 먹칠을 하고 맙니다.
불과 3주쯤 뒤인 2021년 3월 말, 빌 황의 ‘아케고스 마진콜 사태’가 터집니다. ‘투자 천재’로 통하던 한국계 유명 펀드매니저 빌 황이 이끌던 패밀리오피스 ‘아케고스’는 글로벌 IB들(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노무라, CS)의 자금을 끌어들여(총수익스와프계약) 무려 500억 달러를 굴리는 큰손이었는데요(이 중 자기 자산은 100억 달러). 5~10배짜리 레버리지 투자를 하던 아케고스가 주가하락으로 마진콜(증거금 추가납입 요구)을 맞았고, 결국 디폴트(채무상환 불이행)를 선언합니다.
문제는 눈치도 실력인데, CS가 가장 하수였다는 겁니다. IB 중에서도 골드만삭스는 가장 먼저 발을 빼서 아무 손실도 입지 않았고요. CS는 어영부영하다가 IB 중 가장 많은 55억 달러의 손실을 봤습니다. 한해 이익에 해당하는 큰 돈을 한방에 날려버린 셈입니다. 투자은행으로서 실력이 형편없다는 게 드러나 버렸는데요. CS도 나중에 “관리와 통제의 근본적인 실패”가 사태를 초래했다고 인정했죠.
자산관리와 투자은행이 CS를 떠받치는 핵심 사업 분야인데 둘다 크게 사고를 쳤으니 위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주가는 급락했고, 2021년 4분기부터 적자에 빠졌습니다. 무엇보다 크레디트스위스의 이니셜 CS가 ‘CriSis’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명성이 추락했죠.
‘밈주식’이 된 CS
이후에도 크레디트스위스를 둘러싼 스캔들은 이어졌습니다. 2022년 2월 비밀계좌 고객 3만명 폭로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CS 내부고발자가 CS의 고객 3만명의 계좌 정보를 언론에 넘겨버렸는데요. 요르단 국왕, 이집트 독재자 아들, 파키스탄 정보국 수장 아들, 레바논 가수 여자친구 살해를 청부한 억만장자 등. 검은돈이라 의심할 계좌 리스트가 드러났죠. CS는 과거의 일이라고 해명했지만 ‘역시나 불법 자금 세탁의 창구’라는 의심은 커졌습니다. 동시에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강력한 고객 비밀 유지 의무)에 대한 신뢰도 흔들렸고요.
그 직전엔 CS 구조조정을 위해 투입된 안토니오 호타 오소리오 회장이 취임 7개월 만에 그만 두는 일도 있었죠(2021년 4월에 취임해서 2022년 1월에 물러남). 유럽 여행 중 코로나 검역 규정을 위반했다는 황당한 이유였는데요(격리 기간인데 윔블던 테니스 결승전을 보러 감). 안 풀리는 기업은 별 게 다 발목을 잡습니다.
그렇게 분기 적자와 주가 하락 행진을 이어가던 CS에 폭풍우가 다시 몰아친 게 지난해 10월 초. 돌연 트위터와 레딧 토론방에서 CS가 파산 직전이라는 루머(실제로는 그 정도는 아니었음)가 쏟아졌습니다. 영국 정부의 감세 정책으로 금융시장이 출렁이던 시기였죠. 2022년 9월 30일(금요일) 울리히 쾨르너 CS CEO는 “CS는 최근 시장 변동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자본 기반과 유동성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다”면서 직원들을 안심시키는 메모를 보냈는데요. 이게 오히려 주식시장에선 ‘CS가 유동성 위기’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진 겁니다. “CS는 아마도 파산할 겁니다”라는 아마추어 투자자들의 트윗이 한 순간에 전 세계로 퍼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진짜 위기가 닥쳤는데요. 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CDS프리미엄이 치솟고 공매도가 몰리면서 주가는 급락했습니다. 고객들은 돈을 빼기 시작했고요. 망한다던 트윗이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어버린 건데요.
긴박해진 CS 경영진은 꽤 급진적인 구조조정안을 내놨습니다. 향후 3년 동안 9000명을 해고하고(전체 직원 수는 약 5만명), 투자은행 부문을 정리하겠다고 밝혔는데요. 동시에 새로운 돈줄도 잡았습니다. 사우디국립은행이 15억 달러에 CS 지분 9.9%를 사들이며 최대주주가 됐는데요. ‘미스터 에브리싱’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CS를 살릴 구세주가 된 듯했죠. 적어도 얼마 전까진 말입니다.
결국 터지고 말았다
망해가는 기업의 경영자는 마지막까지 거짓말(우리 회사 괜찮아!)로 시간을 끌기 마련입니다. ‘우리 어려워요’라고 솔직히 말하는 순간 끝이니까요(특히 금융회사는). 실리콘밸리은행과 FTX 사태를 봐도 그런데요. 이번 크레디트스위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악셀 레만 CS 회장은 지난해 12월 초 파이낸셜 타임즈와 인터뷰를 했는데요. ‘소셜 미디어 폭풍’으로 10%가량의 고객들이 CS를 떠났지만 이제 다시 돌아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확히는 이렇게 발언했죠. “슬픈 이야기의 좋은 점은 떠나는 고객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고 여전히 우리와 거래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이었습니다. 고객 자금은 지난해 12월는 물론 올해 1월에도 계속 빠져나갔죠. 지난해 4분기에만 은행 예금 잔액이 37%나 줄었다고 합니다. 이달 14일 연례보고서에서 CS는 “재무 보고의 ‘중대한 약점’을 발견했고 고객 자금 유출을 아직 막지 못했다”고 인정했는데요. SVB 파산 사태로 이미 예민해진 시장을 겁에 질리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최대주주인 사우디국립은행 회장의 한마디-“지분율 규제(10%룰) 때문에 CS에 추가 지원 계획이 없다”-가 발작 버튼을 눌러버렸는데요. 15일 CS 주가는 한때 30% 추락했죠.
일단 둑이 한번 터지니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다급해진 스위스 국립은행은 현지시간으로 16일 새벽2시에 500억 스위스 프랑(약 70조6000억원)의 긴급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는데요. 역부족이었습니다. 하루에 100억 달러(약 13조원) 넘게 고객 예금이 빠져나갔으니까요. 결국 스위스 정부는 CS의 라이벌이자 스위스 최대은행인 UBS의 팔을 비틀었습니다. UBS는 당초 제시했던 인수가(10억 달러)보다 3배인 30억 스위스프랑(32억 달러)에 CS를 떠안게 됐습니다.
위기에서 못 배웠다…문제는 신뢰
19일 밤 열린 UBS의 CS 인수 기자회견에서 레만 CS 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CS뿐만 아니라 세계 금융 시장에 매우 슬픈 날입니다. 실리콘밸리은행(SVB) 등 미국 은행의 최근 사태가 불행한 때 발생했습니다.”
글쎄요. 그의 슬픔은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CS가 무너진 게 단지 타이밍 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물론 CS가 자기자본비율 같은 대차대조표 상으로는 꽤 건전한 은행이긴 했습니다. 위험 관리가 부실했거나 각종 스캔들에 시달린 은행이 CS 하나만은 아닐 거고요. 하지만 수년에 걸쳐 고객의 신뢰를 잃으면서 침몰해온 건 다른 누구의 탓이 아닌, CS가 자초한 일이죠. 결정적인 순간 CS의 운명을 결정한 건 바로 고객이었습니다.
CS가 금융위기를 성공적으로 헤쳐나간 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대형 투자은행들이 줄줄이 무너지던 글로벌 금융위기(2007~2008년) 때 스위스 최대은행 UBS마저 구제금융을 받아서 연명했는데요. CS는 구제금융 없이 독자적으로 위기를 헤쳐갔습니다(카타르 국부펀드 등 민간에서 90억 달러 조달).
그 결과 위기 이후에도 다른 길을 가게 됐는데요. UBS를 포함한 경쟁사들이 투자에 보수적으로 바뀐 반면, CS는 여전히 고수익을 좇아 위험을 적극적으로 감수했습니다. 금융위기의 쓴맛을 보지 못한 탓에 철이 들지 않은 거죠. 물론 그 과정에서 내부 통제는 허술했고요.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CS의 몰락은 자신감에 차서 지난 금융위기를 탈출했던 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CS는 위기가 은행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적응하는 속도가 느렸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세상은 빠르게 변해갔습니다. ‘값싼 돈’의 시대가 급격히 끝났고, 시장은 아무나 신뢰하지 않게 됐죠. 블룸버그 기사를 인용하자면 “이런 조합은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은행(=CS)에 너무 많은 것을 증명했습니다.” CS의 몰락이 보여주는 교훈은 명확합니다. 은행은 결국 신뢰로 먹고 살고, 한번 신뢰를 잃으면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죠. By.딥다이브
UBS가 인수한다는 소식이 나온 뒤 크레디트스위스 관련 기사가 쏟아지는데요. FT 기사를 보면 CS의 몰락에 대해 “스위스 금융센터의 수치”이고 “스위스 브랜드를 더럽혔다”고 말하는 스위스인들의 격한 반응이 나옵니다.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란 뜻인데요. CS가 왜 침몰했는지에 대한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CS는 부실한 위기관리로 인해 2021년 그린실 파산과 아케고스 마진콜이란 연타를 맞았습니다. 이후 적자와 주가 하락이 이어지면서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각종 스캔들이 이어졌습니다. 2022년 10월엔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CS 파산설’이 돌았고요. 고객 자금 유출이 현실화되자, 사우디국립은행의 자금을 끌어서 일단 급한 불을 끄는 듯했습니다.
•“고객들이 다시 돌아왔다”던 CS 회장의 말은 거짓말로 드러났습니다. 재무보고에선 ‘중대한 약점’이 발견됐습니다. SVB사태로 불안했던 시장은 공포에 질렸고 고객들은 CS를 떠났습니다. 결국 경쟁은행인 UBS에 인수되는 굴욕을 당합니다.
•한번 잃은 신뢰를 되돌리기란 불가능합니다. 은행은 고객의 신뢰를 먹고 사는 곳이라는 사실을 CS 사태가 확인시켜줍니다.
*이 기사는 2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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