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장 논란이 되는 숫자입니다. 은행이 망해도 보호 받을 수 있는 예금보험 한도금액이죠. 실리콘밸리은행(SVB)의 갑작스런 파산 이후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이 한도를 올리냐 마느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뱅크런과 금융안정을 둘러싼 걱정이 커졌단 뜻인데요.
‘예금보험 한도는 얼마가 적당한가’에 대한 답을 찾는 건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따져볼 점이 한두가지가 아닌데요. 오늘은 이 예금보험제도라는 다소 딱딱할 수 있는 주제를 다 각도로 파헤쳐 보겠습니다.
*이 기사는 2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예금보험제도는 왜 필요할까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예금보험의 역사는 곧 뱅크런의 역사입니다.
미국은 대공황(1929~1933년) 막판인 1933년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설립했는데요. 대공황 때 망한 미국 은행이 몇 곳인지 아십니까. 자그마치 9000곳이나 됩니다. 당시 미국엔 소규모 지역은행이 난립해서 대공황 직전 약 2만5000개 은행이 있었거든요. 그 중 3분의 1 넘게 무너진 겁니다. 예금자들이 막대한 손실을 입은 건 물론이고, 은행 파산이 거래 기업 파산으로 이어지며 위기를 키웠죠. 이에 미국이 세계 최초로 국가 차원의 예금보험제도를 도입합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뱅크런은 왜 일어날까요. 은행이 잘못해서(과도한 레버리지, 투기적인 투자) 자산이 부실해졌기 때문인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잘못한 은행 책임인데, 정부가 나서서 예금보험 제도로 보호해줘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이와 관련한 유명한 연구가 있습니다. 바로 더글라스 다이아몬드 시카고대 교수와 필립 딥비그 워싱턴대 교수가 1983년에 발표한 ‘뱅크런, 예금보험, 그리고 유동성’이란 논문인데요. 얼마나 유명한가 하면 지난해 10월 그들이 이 연구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습니다. 마치 5개월 뒤에 SVB사태가 일어날 걸 예견한 것 같은 놀라운 타이밍인데요.
논문의 결론을 요약하자면 ‘건전한 금융 시스템에서도 파괴적인 뱅크런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은행업’이라는 게 본질적으로 뱅크런의 위험을 안고 있는 활동이라는 거죠.
왜냐고요? 은행이란 단기 예금(언제든지 인출 가능)을 받아서 장기 대출(주택담보대출이나 기업대출, 갚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림)로 전환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예금과 대출은 서로 만기가 안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너무 많은 예금자가 은행에서 예금을 빼내면 어떤 은행도 이를 감당할 수가 없죠. 대출은 즉시 회수가 안 되니까요. 이 때문에 일단 ‘뱅크런 가능성 있다’는 예상이 한번 퍼지기 시작하면 너도 나도 다 돈을 빼기 시작하고 이는 ‘자기충족적 예언’이 됩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고요?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발표됐을 때도 그런 비판은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수학적으로 공식화한 것 뿐이잖아! 그게 무슨 노벨상 감이야’라는 반응이었죠. 하지만 다들 막연하게 알고 있던 걸 학문적으로 증명해내는 게 원래 대단한 업적입니다.
건전한 은행도 뱅크런 위험에 노출돼있다면, 뱅크런을 막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다이아몬드 교수와 딥비그 교수가 1983년 논문에서 강조한 게 예금보험 제도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금보험은 나쁜 은행(부실한 은행)의 생명 연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은행 시스템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거죠.
은행을 무제한으로 보장해준다?
예금보험제도가 그렇게 꼭 필요하다면 보험 한도가 커야 좋은 걸까요. 아예 예금 전액을 보장해주면 어떨까요.
이에 대한 논의가 요즘 미국에서도 활발한데요. 이미 미국 FDIC가 실리콘밸리은행(SVB)과 시그니처은행에 대해 예금 전액 보호 조치를 내놨죠. 이어 21일엔 재닛 옐렌 미국 재무장관이 “중소형 은행이 확산될 위험이 큰 예금 인출 사태에 처한다면 (두 은행과) 유사한 조치가 이뤄질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시장에선 ‘아, 그럼 이제 사실상 모든 은행에서 예금 전액 보호인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서 은행주 주가가 뛰기도 했는데요. 정작 하루 뒤 의회에 출석한 옐런 장관이 “포괄적 보험이나 예금보장과 관련해 어떤 것도 고려하거나 논의하지 않는다”며 말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23일엔 다시 “확실히 정당하다면 추가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며 발언을 또 뒤집었고요.
미국 정치권에서는 SVB사태를 계기로 예금보험 한도를 대폭 높이자는 얘기가 나오는데요. 엘리자베스 워런 미국 상원의원(민주당)은 19일 CBS와의 인터뷰에서 상한선을 200만 달러~1000만 달러까지 높이는 방안을 “당장 테이블 위에 올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25만 달러(3억2000만원)인 지금의 한도를 대폭 올려서 기업활동에 지장이 없는 수준(“중소기업은 급여를 줄 돈을 뺄 수 있어야 한다”)으로 하자는 주장입니다.
참고로 미국 예금보험 상한선이 10만 달러에서 25만 달러로 한도가 높아진 게 2008년 금융위기 때였습니다. 15년 동안 그 수준을 유지한 건데요. 미국의 25만 달러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긴 합니다(미국 다음으로 높은 건 호주, 25만 호주달러=약 2억1500만원).
예금보험 한도를 대폭 높이거나 아예 무제한으로 하자고 주장하는 건 뱅크런 가능성을 크게 줄이거나 아예 없애버리기 위해서입니다. 금융시스템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를 끌어올릴 수 있고요. 사람들이 더 많이 저축을 하고, 그 덕분에 경제가 성장하는 선순환도 기대할 수 있죠.
소규모 은행의 경쟁력을 키우는 효과도 있습니다. SVB 사태 이후 미국에선 중소형 은행에서 대형은행으로 예금이 대거 옮겨갔다고 하죠. 대형은행이 아무래도 더 안전하다고 봤기 때문인데요(일부는 비트코인으로 간 게 아닐까 하는 추측도 나옴). 그런데 모든 은행에서 예금이 무제한으로 보호된다면 이런 대형은행 쏠림현상이 크게 줄어들 겁니다. 참고로 미국엔 은행이 4700곳이나 있습니다(FDIC 가입 기준). 지역의 소형은행이 그만큼 많은 거죠.
한도 높이면 부작용도 있다
한도를 높여서 생기는 부작용도 당연히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꽤 많은 연구가 있었는데요. 가장 많이 거론되는 부작용은 은행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입니다. 예금보험 제도를 등에 업고 아주 쉽게 예금을 유치할 수 있게 되면 은행이 건전성 관리 따위는 내팽개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위험한 고수익을 좇는 데만 몰두하게 될 거라는 거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말 큰일입니다. 오히려 시스템 위기 가능성을 더 키우는 꼴이니까요.
실제 두 여성 경제학자(아슬리 데미르구치-쿤트와 엔리카 데트라자케)가 2000년 이와 관련해 여러 국가 데이터를 연구한 게 있는데요(‘예금보험이 은행 시스템 안정성을 증가시키는가. 경험적 조사’). 결론은? ‘예금보험이 항상 금융안정에 기여하는 게 아니고 은행 위기 위험을 오히려 증가시킬 수도 있다. 특히 예금보험 적용 한도가 높고 은행 규제가 약할 수록 그럴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겁니다. 따라서 예금보험 시스템을 잘 설계해야 한다(+은행 규제가 중요하다)는 결론입니다.
예금보험 한도를 높이면 다수가 아닌 소수 부자들만 혜택을 보게 된다는 것도 한도 상향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논리입니다. 상한선을 넘는 예금 계좌를 가진 건 기업이나 부자들일 테니까요. 동시에 ‘대마불사(too big to fail)’가 더 공고해지면서 대형은행들만 주가도 뛰고 더 잘나가게 될 거란 지적도 나옵니다. 엉뚱한 데(대형은행과 그 주주들)가 덕보는 거죠.
미국이나 한국 모두 예금보험 기금은 세금이 아닌 은행이 내는 보험료로 채워지죠. 따져보면 실제로는 결국 은행 고객들이 그 돈을 내는 겁니다. 예금보험료가 오르면 은행은 고객에게 줄 예금 이자를 깎거나 대출이자를 올리는 식으로 그걸 보충하겠죠. 만약 ‘예금 전액 보장’을 해주기로 했는데, 금융위기가 일어나서 은행이 줄줄이 망하는 바람에 기금이 바닥나 버리면? 그땐 국민 세금으로 메우게 될 겁니다. 결국 모든 금융 소비자, 어쩌면 국민들이 져야 할 수 있는 부담도 그만큼 커집니다. 위스콘신대학의 마이클 콜린스 교수는 CNN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금 전액 보장을 한다면) 소비자는 저축 계좌의 이자율이 살짝 낮아지거나 이런 저런 수수료에 그것이 스며드는(수수료가 높아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한국은 5000만원? 1억원?
한국은 2000만원이었던 예금자보호 한도를 2001년 5000만원으로 높였습니다. 이후 23년째인 지금까지 5000만원인데요. 미국, 호주, 유럽연합(10만 유로=1억4000만원), 영국(8500만 파운드=1억3000만원), 일본(1000만 엔=9800만원), 캐나다(10만 캐나다달러=9400만원), 중국(50만 위안, 9400만원)보다 낮은 수준입니다.
경제규모도 있고, 물가도 올랐는데 이제 한도를 1억원 정도로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 많은데요. 이미 관련 법도 국회에 계류돼 있습니다.
한도를 높이는 것의 장단점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습니다. 효과와 부작용이 모두 있죠. 거기에 하나 덧붙일 게 있습니다. 어느 정도 다른 나라와 균형을 맞출 필요는 있다는 거죠.
물론 일반 개인 예금자라면 미국이 한국보다 보호한도가 높다고 해서 ‘한국 말고 미국 은행에 예금해야지’라며 옮겨가는 경우는 거의 없을 텐데요. 글로벌리 운영되는 기업이나 초고액 자산가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대부분 국가들이 비슷비슷한 수준(1억원 안팎)으로 한도를 맞추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은행은 망할 수 있고, 그 위험을 줄이기 위해 예금보험제도는 꼭 필요합니다. 예금자는 그걸 잘 활용해야 하고요. 한도(현재는 원금+이자 5000만원)에 맞춰 금융회사를 분산하는 것은 언제나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By.딥다이브
개인적으로 예금보험제도에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평소엔 일반의 관심과 동떨어진 주제라 다룰 일이 별로 없었는데요. 이번에 미국 SVB 사태로 갑자기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길래 한번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다소 추상적인 논의인데 잘 전달이 됐는지 모르겠네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대공황 때 뱅크런이 무섭게 번지자 미국은 연방예금보험공사를 만들어 진화에 나섰습니다. 모든 은행은 ‘단기 예금’을 ‘장기 대출’로 바꿔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뱅크런 위험이 상존합니다. 예금보험제도는 이를 막기 위한 효과적인 제도입니다.
-미국에선 최근 2개 은행에 대해 ‘예금 전액 보장’ 조치를 취했습니다. 시장에선 미국 정부가 이를 다른 은행으로 확대할지 말지를 주의 깊게 지켜봅니다. 이 기회에 예금 보험금 한도를 대폭 올리자는 주장도 나옵니다.
-예금보험 한도를 높이면? 금융시스템을 안정시키고 소형은행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은행 규제가 약한 경우엔 한도를 높이면 오히려 금융 위기 가능성이 커진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한국은 한도를 1억으로 높이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부자만 덕본다는 형평성 문제뿐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균형도 고려해 결정해야 하겠습니다.
*이 기사는 2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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