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 교육을 받은 사람인데 막상 나와 내 기업에 대해 한국보다 영국이 더 많이 알아주고 있다.”(‘샤코 뉴로텍’ 정수민 대표)
처음부터 한국이 아닌 먼 이국땅에서 창업하는 이른바 ‘본 글로벌’ 스타트업이 늘고 있다. KOTRA가 지난해 12월 세계 29개국에 자리 잡은 한국계 해외 진출 스타트업 259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32개사(51%)는 한국에 모기업 없이 아예 처음부터 해외에서 창업한 ‘본 글로벌’ 기업이었다. 2020년 50개사(37%), 2021년 91개사(46%)였던 본 글로벌 스타트업의 수와 비중이 꾸준히 늘고 있는 것이다.
본보는 이 중 미국과 영국에 둥지를 튼 본 글로벌 스타트업 대표 4명을 직접 인터뷰했다. 특별한 연고도 없이 해외에서 창업하는 과정은 분명 고난의 연속이었다. 2016년 영국 런던에 한류 콘텐츠 제작 및 지식재산권(IP) 관리 등을 아우르는 플랫폼 서비스인 ‘프론트로(Frontrow)’를 세운 이혜림 대표(37)는 “마치 황무지에서 홀로 헤엄치는 기분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런데도 대표들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다시 창업한다 해도 한국이 아닌 해외를 선택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될성부른’ 아이디어를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창업을 밀어붙이는 대학의 인큐베이팅, 창업가를 위한 통 큰 비자 지원, 법인 설립 쾌속 절차 등 해당 국가들의 촘촘한 창업 지원 인프라가 한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영국은 기업등록관청인 컴퍼니스하우스 홈페이지에서 12파운드(약 2만 원)만 내면 30분 만에 법인 등록이 가능했다”며 “마치 사이트 회원 가입하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英선 2만원 내면 30분내 법인 등록… 창업 지원 인프라가 달라”
해외 창업 스타트업 증가 “외국은 창업에만 집중하게 지원… 세금-규제 혜택 받을거란 믿음 있어 韓, 스타트업 환경-투자정책 등 글로벌 스탠더드 맞춰야 韓서 창업”
현재는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 중인 스타트업 대표들이지만 이들 모두 한국에서 교육을 받고 직장 생활을 하던 ‘토종 한국인’이었다. 2016년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의료용 로봇 스타트업 ‘로볼리전트(Roboligent)’를 세운 김봉수 대표(45)는 KAIST 기계공학과 석사 졸업 후 30대 초반까지 한국전력공사 전력연구원에서 근무했다. 로스앤젤레스(LA)에서 신인 작곡가 발굴 및 음악 저작권을 관리하는 ‘스카이워드뮤직펍’을 운영 중인 이광복 대표(41) 역시 한국 대학을 나왔고, 이벤트 기획 일을 하다 뒤늦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해외 창업 생태계는 그들을 자연스럽게 창업가로 바꿔놓았다. 로봇을 공부하고 싶어 무작정 텍사스로 왔을 뿐 애초 창업할 생각은 하지 않았던 김 대표였지만 텍사스대는 그의 연구물을 내버려두질 않았다. 그는 “학교에서 먼저 창업 얘기를 꺼냈고, 이후 학내 인큐베이터(창업보육) 지원을 받게 되면서 오로지 창업에 길들여지게 됐다”고 말했다.
영국에서 파킨슨병 증상완화 의료기기 개발업체 ‘샤코 뉴로텍(Charco Neurotech)’을 차린 정수민 대표(36)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고려대 산업정보디자인과를 나와 2013년 영국 임피리얼칼리지런던(ICL)과 왕립예술학교(RCA)의 혁신디자인공학과 이중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그는 “학교가 내가 디자인한 것에 대해 특허도 내주고 투자도 해주면서 적극 나섰다”라면서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저절로 영국에서 회사를 차리게 됐다”고 밝혔다. 정 대표는 특히 기업등록관청 홈페이지에 12파운드만 내고 30분 만에 법인을 만들 수 있는 초간단 설립 절차를 큰 매력으로 여겼다. 마치 웹사이트에 회원 가입하듯 간편하다는 것이다.
대학 외에도 현지 정부의 비자 정책, 창업 인프라 등은 이들이 오로지 창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줬다. ‘K콘텐츠의 유럽시장 개척’이라는 꿈을 안고 런던을 찾은 이혜림 대표는 첫 3개월 동안 RCA 인큐베이터 센터 교육생으로 사업 모델 개발에 전념했다. 센터를 수료하고 비자 문제로 고민하던 찰나 영국 정부는 이 대표의 성장 가능성을 인정해 연구·문화예술 등 분야 해외 우수 인력에게 제공하는 ‘글로벌 탤런트 비자’를 발급해줬다.
물론 이들이 탄탄대로만 걸었던 건 아니다. 창업 초반 사무실을 구할 돈이 없었던 김 대표는 자택 차고에서 연구를 이어가야 했다. 정 대표는 “매번 미팅을 하고 나면 내가 알아들은 게 맞는지 재차 되물어야 했다. 나로 인해 사업에 차질이 생길까 봐 밤낮 없이 영어 공부를 해야 했고 지금도 공부하는 중”이라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다시 창업해도 해외를 선택하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같은 기회와 혜택들을 과연 한국에서도 누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혜림 대표는 “영국 스타트업 생태계 내에는 사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무궁무진하다. 세금, 규제 혜택은 물론이고 기본적으로 내 기업이 한국보다 더 합당한 밸류에이션(가치평가)을 받을 거란 믿음이 있다”고 말했다.
직원 40여 명을 둔 글로벌 강소기업의 대표로 성장한 정 대표는 이미 한국법인을 차리고 경기도 공장에 제조를 맡겼다. 이혜림 대표는 “스타트업 환경과 투자 정책 등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한국인들이 굳이 해외로 나가지 않아도 글로벌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최항집 스타트업얼라이언스센터장은 본 글로벌 스타트업의 증가세를 두고 “(유학 등으로) 실리콘밸리에서 활동하는 해외 인재들이 크게 늘었다”라며 “본 글로벌 성공 사례가 나오면서, 이들을 레퍼런스 삼아 해외서 활발한 창업활동이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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