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2032년 신차의 3분의 2를 전기차로 채우고, 내연기관차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대폭 줄이라는 규제 초안을 내놓으면서 한국 기업들도 발 빠른 대응이 불가피해졌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전기차 비중을 당초 목표보다 더 가파르게 올리기 위해 내연기관차 전략을 재검토할 필요가 생겼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북미 사업의 추가 확대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미 환경보호청(EPA)이 12일(현지 시간) 공개한 운송 분야 탄소 배출 감축안은 2032년 미국에서 판매되는 신차의 67% 이상을 전기차로 채우는 게 핵심이다. 내연기관차의 경우 질소산화물과 미세먼지 등의 배출 허용 기준을 단계적으로 강화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32년 1마일(약 1.6km)당 82g으로 줄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2026년 기준인 1마일당 186g보다 약 56% 수준으로 감축됐다.
이는 2021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발표했던 2030년 신차 중 전기차 비중 50% 달성 목표를 더 강화한 것이다. 미국 내에서조차 실현 가능성을 두고 회의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 실제 지난해 미국 내 전기차 판매 비중은 5.8%였다.
미국 시장 점유율 확대를 노리고 있는 현대차그룹은 전기차 생산 규모를 더욱 늘려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현대차는 지난해 전체 미국 판매량의 3.8%, 기아는 4.1%가 전기차였다. 지난해 현대차는 2030년 전기차 판매 비중 목표를 58%(53만 대)로 세웠고, 기아는 6일 열린 ‘CEO 인베스터 데이’에서 47%(47만5000대)를 제시했다. 반면 EPA는 규제 강화의 효과로 2032년 현대차의 경우 전체 판매량의 70%, 기아는 71%를 전기차로 채울 것으로 전망해 부담이 커졌다.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축을 위해서도 전기차 판매를 늘려야 한다. 내연기관차 판매는 갈수록 어려워질 수 있다. 미국에서 판매 중인 내연기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현대 싼타페와 기아 쏘렌토는 각각 1마일당 375g, 377g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국내 배터리 제조사들은 북미 사업 기회가 더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기차 생산이 늘어나는 만큼 배터리 수요도 덩달아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는 12일 2035년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이차전지 시장은 수요가 4.6TWh(테라와트시)에 이르는 반면 공급은 3.0TWh에 그칠 것으로 봤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시행하는 미국, 핵심원자재법(CRMA) 도입을 예고한 유럽 중심으로 배터리 수요가 늘어나고 생산설비 증설도 이어지고 있다. 이에 국내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는 지난해 생산능력 기준 전 세계 배터리 시장의 75%를 중국이 차지했지만 2035년에는 38%까지 낮아지고, 미국은 6%에서 31%, 유럽은 12%에서 27%로 늘어날 것으로 봤다. 하지만 2030년 이후 폭증하는 배터리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분석했다.
배터리 3사가 완성차 업체들과 해오던 합작(JV) 사업도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완성차 업체들이 전기차 투자에 대한 부담을 배터리 업체들과 나눠 가지려 할 것”이라며 “JV는 배터리 기업 입장에서 명확한 공급처를 확보하는 모델이기 때문에 서로 윈윈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한편으로는 수요·공급 불균형 심화를 메꾸기 위해 결국 중국 업체들이 다시 진입 기회를 가질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IRA 도입 취지에 따라 배터리 산업은 ‘한미일 중심’이 되고 있지만, 중국의 움직임은 늘 예의 주시해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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