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 직전까지 몰렸던 미국 퍼스트리퍼블릭은행에서 올 1분기(1∼3월) 고객 예금 1020억 달러(약 136조 원)가 빠져나간 것으로 나타났다. 시장 예상보다 심각한 예금 이탈에 24일(현지 시간) 실적 발표 직후 시간외 거래에서 이 은행 주가는 22% 폭락했다. 지난달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이 촉발한 미 은행 위기는 진정 국면이지만 여전히 불안함을 보여주는 방증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 마크 잔디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은행 위기가 극복된 것처럼 보이지만 경제적 영향은 이제 막 나타나기 시작했다”며 “유동성이 제한된 은행들은 훨씬 더 신중해질 것”이라며 경기 침체 우려도 내비쳤다.
● “JP모건 구제 없었다면 예금 58%↓”
퍼스트리퍼블릭은 SVB와 시그니처은행 폐쇄 이후 붕괴 우려가 크다는 시장 불안감 속에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이 집중됐다. SVB처럼 샌프란시스코를 기반으로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 같은 부호들이 주 고객이어서 예금 보호 한도 25만 달러를 넘는 예금이 전체의 약 70%였다. 추가 은행 위기의 바로미터 같은 은행이어서 이날 1분기 실적 발표에 시장 이목이 집중됐다.
퍼스트리퍼블릭은행 예금 이탈은 600억∼700억 달러를 내다본 시장 예측보다 더 심각했다. 지난달 뱅크런이 집중되면서 이 은행 예금은 지난해 12월 말 기준 1765억 달러(약 236조 원)에서 3월 말 기준 1045억 달러(약 140조 원)로 41% 감소했다. JP모건을 비롯한 미 11개 은행이 은행 위기 전염을 막고자 긴급 예치한 300억 달러가 없었다면 인출 예금액은 1020억 달러가 돼 58%나 줄어든 셈이다.
1분기 순이익(2억7000만 달러)도 전년 동기보다 33% 줄었고 매출도 13% 감소했다. JP모건, 뱅크오브아메리카 같은 미 대형 은행이 예대마진 상승으로 어닝 서프라이즈를 보인 것과 대조적이다.
이날 콘퍼런스 콜에서 애널리스트 질문을 일절 받지 않은 퍼스트리퍼블릭 측은 “은행 임직원을 최대 25% 줄이고 임원 급여를 삭감하겠다”며 “다른 전략적 옵션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은행 매각까지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 무디스 “지역 은행 불확실성 여전”
SVB 파산 당시 위기를 함께 겪은 미 중소형 지역 은행들은 가까스로 위기를 극복한 상황이지만 주가는 여전히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20일 실적을 발표한 웨스턴얼라이언스가 1분기 예금이 60억 달러(약 8조 원) 이탈했다가 이달 들어 12억 달러(약 1조6000억 원) 늘었다고 발표하자 주가가 24% 급등했다. 21일 시장 예상보다 저조한 1분기 실적을 발표한 지온스 주가는 7%가량 하락하는 등 변동성이 여전히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지역 은행을 중심으로 불확실성이 크다고 보고 최근 US뱅코프와 자이언스뱅코프, 뱅크오브하와이 같은 지역 은행 11곳의 신용등급을 모두 낮췄다. 실적이 예상보다 좋았던 웨스턴얼라이언스도 두 계단 내려갔다. 무디스는 “자금과 운영 조건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향 조정 사유를 밝혔다.
미 중소기업과 상업 부동산을 떠받치고 있는 지역 은행에 대한 지속적인 불안감이 결국 경기 침체를 야기할 것이라는 우려도 퍼지고 있다. 로버트 캐플런 전 댈러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최근 “많은 중소기업이 ‘더 이상 대출이 불가능하다’ ‘대출금리를 재산정해야 한다’는 은행 전화를 받고 있다”며 “현재 은행 위기는 야구로 치면 2, 3회 정도”라고 평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저축대부조합(S&L) 3000여 곳이 몇 년에 걸쳐 파산했던 1980년대 후반 같은 ‘슬로 모션’ 위기가 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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