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세계 휩쓰는 K 열풍, 한국인 속마음은
본보, 전국 1850명 대상 설문조사
절반가량은 ‘한국인 자긍심’ 없어
10∼20대는 한국 위상 체감 못해
《전 세계 K열풍, 한국인의 속내는
K팝, K푸드 등 전 세계적으로 ‘K’ 열풍이 거세다. K의 선전은 한국인의 자긍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본보가 1850명 설문 조사를 통해 국가 자긍심에서부터 가장 부끄러운 K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속마음을 들여다봤다.》
세계적으로 ‘K’ 열풍이 거세다. K팝 인기를 필두로 한 K콘텐츠의 영향력은 K푸드, K뷰티 등으로 급속히 확장되고 있다. K열풍에 힘입어 한국 콘텐츠 산업은 코로나19 기간이었음에도 2019년 126조7000억 원에서 지난해 146조9000억 원 규모로 16%가량 성장했다. ‘오징어 게임’ ‘더 글로리’ 등이 줄줄이 히트를 치면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가 향후 4년간 K콘텐츠에 25억 달러(약 3조3000억 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것도 K콘텐츠의 달라진 위상과 무관치 않다.
한국 문화와 한국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이처럼 높아지고 있음에도 정작 ‘K’에 대해 자긍심을 느끼는 한국인은 많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오히려 한국인 5명 중 1명꼴로 ‘한국인인 것이 싫다’고 답했다. 한국인인 것에 거부감을 드러낸 답변은 특히 K팝의 가장 열렬한 소비자이자 수혜자인 이른바 ‘잘파세대’(Z세대+알파세대·10∼20대)에서 가장 높았다.
● 자긍심 낮은 한국인 잘파세대는 ‘빨간불’
동아일보와 SM C&C 설문플랫폼 틸리언프로가 최근 전국 10∼60대 남녀 1850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으로서의 인식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한국인인 것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고 답한 응답자는 55.2%로 절반을 조금 넘기는 데 그쳤다. 나머지 절반가량(44.8%)은 한국인인 것이 별로 자랑스럽지 않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객관적인 문화·경제적 여건을 감안했을 때 한국인은 전반적으로 자긍심이 낮은 상태라고 진단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물적·심적 자원으로 봤을 때 우리나라는 더 행복해야 한다”며 “압축성장 과정에서의 비교 압박 속에서 부정적 성향이 두드러진 결과로 보인다”고 말했다. 홍진표 성균관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전통적으로 자신에게 엄격한 한국 문화 때문에 스스로의 성취를 폄훼하는 경향이 있다”며 “문화적, 경제적으로 긍정적인 여지가 충분하지만 부정적인 측면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라고 봤다.
응답자 5명 중 1명(22.6%)꼴로는 아예 “한국인인 것이 싫다”고 답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런 부정성이 특히 10∼20대인 잘파세대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한국인인 것이 싫다’는 응답은 전체의 22.6%였는데 알파세대인 10대에서는 28.8%, Z세대에서는 29.4%로 눈에 띄게 높았다.
● “한국 사회, 힘들고 복잡하고 피곤한 곳”
잘파세대는 한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복수 응답)로 입시 및 취업 경쟁 등 혹독한 경쟁(39%), 야근 등 삶 자체가 힘들고 피곤(34.3%), 과시 등 보여주기식 문화(20.3%) 등을 꼽았다. 이모 씨(28·인천 미추홀구)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공기업에 다니고 있지만 내 삶이 이보다 더 나아지기 힘들다는 생각을 늘 한다”며 “미래가 뚜렷하게 안 보이기 때문에 내 삶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 역시 주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이들이 꼽은 한국의 주요 이미지(복수 응답) 중 상위 5가지는 ‘경쟁적이다’ ‘정신없다’ ‘힘들다’ ‘복잡하다’ ‘피곤하다’였다.
이는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이 가장 높고(60.3%), 한국인인 게 싫다고 응답한 비율(18%)이 가장 낮았던 50대에서 ‘선도적이다’ ‘세련됐다’ 등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상위권에 오른 것과 대비되는 결과다. 특히 20대는 K팝, K드라마, K반도체 등 중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K를 꼽아 달라는 질문에서 모든 항목에 대해 전 세대 평균보다 낮은 선택률을 보였다.
● K 세계로 뻗어도 “K의 성공과 내 삶 무관”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이 잘파세대의 세대적 특성에 한국적 특수성이 더해진 결과로 분석했다. 젊은 세대일수록 사회에 대한 불만이 높고 행복감이 떨어지는 것은 국가를 막론한 보편적인 성향이지만, 한국은 압축성장 이후 해결되지 못한 공정성, 양극화 문제 등이 가중되면서 잘파세대의 자긍심이 비교적 낮아졌다는 것이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는 “한국의 극적인 위상 변화를 체감하면서 자긍심을 느끼는 장년층과 달리 선진국 진입 후 성장한 젊은 세대는 오히려 공정성 등에서의 불만, 반항심 때문에 비판적 성향이 더 큰 측면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고도의 경제 성장기를 거치며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의 진입을 지켜본 50∼60대 장년층들은 한국인인 것이 뿌듯하다는 답변이 58.5%에 달해 전 세대 중 가장 높았다.
10∼20대 응답자들은 K의 활약을 자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연결시키지 않았다. 대학원생 황모(27) 씨는 “K콘텐츠를 즐겨 보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한국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가 생기진 않는다”며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재력, 연줄, 집안으로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미래가 없는 것 같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모 양(14·부산)은 “K팝 성공이 나하고는 상관없다”고 했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집단주의 문화에서 개인주의 문화로 옮겨가고 개인적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는 이가 많아지면서 국위 선양이 국가에 대한 자부심으로 연결되는 시대가 지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부 주도하에 애국주의적 관점에서 홍보하는 K에 대한 반감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류웅재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한국 콘텐츠 내에서도 팝, 영화, 드라마 등의 특성이 모두 다른데 정부에서 단일대오를 갖춘 획일화된 방식으로 K란 단어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클리셰처럼 반복되는 데 식상함을 느낄 수 있다”며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프레임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 “사회적 신뢰도 회복과 행복 계몽 필요”
국가 자긍심은 삶의 만족도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한국은 행복 열등국가다.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의 2022년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들이 스스로 매긴 주관적 행복도 점수는 10점 만점에 5.95점으로 세계 57위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에서는 35위였다. 김석호 서울대 교수는 “국가 자긍심은 개인의 생활과 사회경제적 조건을 국가가 보장해준다는 정책과 제도에 대한 신뢰가 기반이 되고 투명하게 작동한다고 믿을 때 높아진다”며 “결국은 사회적 신뢰 회복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번 설문 결과에서도 다른 세대에 비해 출산, 직장 등 사회적 스트레스가 높은 30∼40대는 ‘현재 삶에 만족한다’는 응답이 33%로 전체 평균(37.7%)보다 낮았는데, 국가 자긍심 역시 51.8%로 전 세대 평균(55.2%)보다 낮게 나왔다.
특히 젊은 세대가 자긍심과 행복감을 갖고 사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압축성장 당시를 지탱하던 가치관이 아니라 행복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과 행복 계몽운동 같은 의식적 노력이 필요한 때라는 지적도 나왔다. 한국 사회 내의 문제에만 집중하기보다 외부·객관적 시각에서 우리 사회의 성취를 바라보고, 역사적 이해를 바탕으로 자긍심을 높이려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지금까지 ‘더 잘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성장의 추동력이 됐다면 이제는 우리가 소홀히 했던 행복에 대한 계몽이 필요한 시대”라며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간과돼 왔던 행복 문화를 확산시키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압도적 지지 받은 ‘K팝’, 혐오감 불러일으킨 ‘K정치’
[토요기획] 세계 휩쓰는 K 열풍, 한국인 속마음은 한국인의 최애·극혐 K 살펴보니 10대 응답자 62% “K팝 자랑스러워” K드라마-반도체-푸드 인기도 높아
한국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K는 ‘K팝’인 반면에 가장 부끄러워하는 K는 ‘K정치’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설문조사에서 K가 붙은 단어 중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단어가 무엇이냐는 질문(이하 복수 응답)에 K팝을 꼽은 응답자가 전체의 47.8%로 가장 많았다. 특히 10대의 경우 K팝을 꼽은 이들이 전체의 62.7%에 달했다.
K팝은 최근 비단 엔터테인먼트 업계뿐만 아니라 외교,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떨치고 있다. 미국 외교전문지 디플로맷은 “K팝이 긴장된 국제 정세 속 외교·경제·안보 등 다방면으로 한국의 정치외교적 입지를 넓히는 데 지대한 기여를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BTS는 유엔총회 연설, 백악관 초청 등 민간 국가 홍보 대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K팝에 이어 K드라마·영화(38.5), K반도체(31.5%), K푸드(30.9%) 순으로 응답률이 높았다. 한국을 자랑스럽게 느끼게 하는 요인으로 가장 많이 꼽은 것도 ‘K팝 등 세계적 주목을 받는 콘텐츠의 영향력’(44.9%)이었다. ‘한국 기업들의 선전’(38.3%), ‘의료시스템과 복지’(28.5%), ‘K푸드와 K패션 등 한국 소비재 인기’(27.7%), ‘스포츠 선수 활약’(24.4%)도 많이 꼽혔다.
반면 K가 붙는 가장 부끄러운 단어로는 K정치(52.7%)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K지옥(26.7%), K장남·장녀(21%), K워킹맘(21.3%), K직장인(19.8%) 등이 뒤를 이었다. K정치가 부끄럽다고 답한 이들은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많았다. 50대의 67.9%, 60대의 70.2%가 K정치가 부끄럽다고 답해 장년층일수록 정치에 대한 관심도 높고 불신 역시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부정부패가 높은 사회라는 인식과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부정적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부끄러운 K에 ‘K워킹맘’ ‘K직장인’ 등이 다수 포함된 것은 직장과 출산 등에 대한 사회적 스트레스가 반영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은 좋아도 직장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안의 위계적 문화와 경쟁이 큰 압박감으로 작용하는 구조”라며 “일하는 여성들이 양육 등에서 느끼는 어려움도 이런 부담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임명호 단국대 교수는 “직장은 다른 문화에서 일했던 기성세대가 포진해 있어 단번에 문화를 바꾸기 어렵고 세대 갈등도 많을 수 있다”며 “출산, 육아와의 양립이 어려운 직장 문화가 스트레스가 되고 있는 만큼 사회적 인프라를 보완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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