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일본은 수출 규제를 통해 한국 반도체 산업을 압박했다. 우리나라가 취약한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가 타깃이었다.
일본의 태도는 최근 180도 변했다. 한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철조망을 걷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방한해 우리나라 경제단체장들에게 한일 간 협력이 중요하며 기업이 먼저 나서 달라고 주문했다.
일본이 지난 30년간 반도체 산업에서 손을 놓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소부장 분야에서 꾸준히 실력을 쌓고 있었다. 일본 열처리 장비 기업의 지인에게 “일본 반도체 산업이 오랜 불황인데, 어떻게 회사를 유지해 왔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분은 “일본 대기업들은 불황에도 약간씩이라도 일감을 줘 회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호황이 왔을 때를 대비해 기술력을 확보해 두는 것이다. 우리 기업들도 참고할 만한 사항이다.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들은 해빙 무드를 살려 실익을 찾아야 한다. 일본은 반도체 후공정(반도체 패키징·반도체 소자를 외부와 연결해주는 공정) 강화로 반도체 왕국으로 부활하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나섰다. 반도체 후공정은 반도체 기술이 맞닥뜨린 회로 미세화 한계를 극복하면서, 향후 글로벌 반도체 패권을 결정할 중요한 키워드로 부상했다. 요미우리신문은 후공정은 일본이 반도체 산업에서 이길 수 있는 마지막 분야라고 보도했다. 일본 이비덴, 신코, 레조나크, 아지노모토 같은 세계 톱 수준의 기업들이 건재하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 상황은 녹록지 않다. 메모리반도체 중심의 한계가 드러났다. 미래 투자를 게을리하는 순간 과거 일본처럼 추락할 수도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첨단 패키징 연구개발(R&D)에 20조 원을 투자한다고 결정했다. 반도체 후공정 산업 생태계 구축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가운데 일본이 반도체 재건 정책을 펼치면서 한국과의 협력을 제안해 왔으니, 놓치면 안 되는 기회다. 특히 한국이 취약한 후공정 패키징 분야 강자인 일본이기에 양국 협력이 강화되면 큰 실익을 챙길 수 있다. 도쿄대, 도호쿠대, 오사카대 등 일본 주요 대학들은 후공정 연구를 지속하고 있으니 우수 인력 유치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는 이번 주 국제 콘퍼런스 참석차 일본 센다이시에 머물고 있다. 이곳에 반도체 소재와 공정 기술을 리드하고 있는 도호쿠대가 있다. 이 대학은 오랜 산업현장 경험을 가진 엔지니어들을 정교수로 초빙해 계속 연구할 기회를 주고 있다. 자연스레 산학협력이 이뤄진다.
대만 TSMC, 미국 인텔은 반도체 후공정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먼저 움직였다. TSMC는 2년 전 첨단 패키징 기술 연구소 설립을 위해 일본에 200억 엔을 투자했다. 한국은 한발 늦었다. 서둘러야 한다. 기시다 총리의 바람대로 우리 기업이 먼저 움직여 일본에 교두보를 놓는다면 우리 경쟁력도 한층 탄탄해져 국가 경제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 미래를 위해 일본은 더 이상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협력해야 할 이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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