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16일 일요일은 유럽의 원자력 발전 산업 역사에서 특별한 날로 기록될 겁니다. 두가지 큰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인데요. 하나는 독일이 이날부터 더 이상 원자력 발전으로 전기를 생산하지 않게 됐습니다. 독일은 4월 16일 0시를 기해 운영 중이던 마지막 원전 3기를 폐쇄했죠. 60여 년간 이어졌던 독일 원자력 발전 시대가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원자력 발전은 친환경이 아니며 지속가능하지도 않다는 독일 정부 입장은 분명하다”고 슈테피 램케 독일 환경부 장관은 이야기했습니다. 1970년대부터 거의 50년 가까이 이어져온 독일의 반원자력 운동 세력의 승리라 할 수 있죠. 또다른 이벤트는 몇시간 뒤 발트해 인접국 핀란드에서 벌어졌습니다. 무려 17년의 공사를 마치고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인 ‘올킬루오토 3호기’가 이날 전기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유럽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새로 문을 연 것 자체가 16년 만에 벌어진 사건인데요. 무엇보다 올킬루오토 3호는 시간당 발전량이 무려 1600MW로, 유럽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원자력 발전소입니다(1, 2위는 모두 중국). 핀란드 전체 전력의 14%나 담당하게 된다는데요.
핀란드엔 환경운동이 없냐고요? 그럴 리가요. 핀란드에서도 2007년 그린피스 활동가들이 올킬루오토 3호기 건설 부지의 크레인 위에 올라가 며칠씩 항의 농성을 벌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수년간은 원자력 반대운동이 거의 자취를 감췄다는데요. 과연 무엇이 핀란드를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반원전 운동을 가라앉히고 여론을 돌려 놨을까요.
전쟁 그리고 탄소중립
가장 최근에 등장한 이유라면 다들 짐작하시는 바로 그 사건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러시아가 지난해 겨울 유럽으로의 석유∙가스 수출을 중단하면서 각국이 치솟는 전기요금과 추위에 떨어야 했는데요. 핀란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영향으로 2022년 말부터 2023년 초까지 핀란드의 수많은 가정용 전기 사우나 시설이 데워지지 못했죠. 사우나가 일상인 핀란드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는데요.
그 결과 지난해 설문조사에서 핀란드인의 65%가 ‘원자력 발전을 늘려야 한다’고 응답할 정도로 원전 찬성 여론이 힘을 받았습니다. ‘현재 수준 유지가 적합하다’가 18%, ‘원전 발전을 줄여야 한다’가 11%였죠.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라도 국내 에너지 생산을 충분히 늘려야 한다는 절박함이 반영된 겁니다.
‘2050년 탄소 중립(Net Zero)’이란 국제사회가 합의한 목표도 원자력에 대한 시각을 바꿔놓은 결정적 이유입니다. 탄소 중립으로 가기 위해 제거해야 할 타깃은 석탄∙석유 같은 화석연료이죠. 문제는 이를 대체할 태양광∙풍력 같은 신재생에너지원 공급을 생각처럼 급격하게 늘릴 수가 없다는 건데요.
그 속도가 얼마나 느리냐 하면 1996년에 전 세계 전력 생산에서 화석연료가 아닌 저탄소 에너지원 비중이 38%였는데요(원자력 18%, 수력과 기타 재생에너지 20%). 2021년엔 40%였습니다(원자력 10%, 풍력 7%, 태양광 3%, 수력과 기타 20%). 25년 동안 애를 썼건만 고작 2%포인트 늘어난 겁니다.
각국이 돈도 많이 들고 여론도 좋지 않은 원자력 발전소 설치를 중단하고, 오래된 원전은 가동을 중단하다 보니(조기 폐쇄도 많았음) 그렇게 됐는데요.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탄소 중립으로 가긴 가야 하거든요. 2050년까지 남은 시간도 별로 없고요. 전 세계 공통의 적인 화석연료를 퇴출시키기 위해서라도 이젠 원자력과 화해하고 손을 잡자는 타협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는 일부 환경운동가들의 시각마저 변화시키고 있는데요. 그린피스 핀란드 지부장인 토우코 시필라이넨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후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겁니다. 원자력 논쟁은 더 이상 이전만큼 핀란드의 기후 정책과 관련이 없습니다.”
원전의 부활이 시작됐다
미국 조지아 발전소의 보글 원자로 3호기는 지난 3월부터 전력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7년 만에 미국에 새 원전이 생긴 건데요. 2009년부터 짓기 시작했으니 무려 14년이나 걸린 데다, 공사비용도 당초 예산(4호기 포함 140억 달러)의 두 배(300억 달러 추산)로 불어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죠.
그동안 미국에선 2007~2009년 발표했던 원전 프로젝트 중 24개가 엎어졌습니다. 건설까지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였는데요. 그래서 다들 ‘보글이 미국의 마지막 대규모 원자력 프로젝트’가 될 거라고 봤죠. 그런데 이런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고 합니다. 역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영향인데요. 원자력 연구단체 굿에너지콜렉티브의 제시카 로버링은 블룸버그에 이렇게 말합니다. “원자력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습니다. 더 많은 흥분이 있고 ‘이게 정말 필요해?’라는 의문은 적어졌죠.” 어쩌면 추가로 대형 원자로 건설에 나설 기업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전문가 전망까지 나오기 시작합니다. 유럽에선 꽤 많은 국가가 신규 원전 건설에 이미 나섰거나 추진 중입니다. 폴란드(1단계 사업을 지난해 10월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수주), 체코(두코바니 5호기 건설 추진, 2023년 말 업체 선정 예상), 루마니아(체르나보다 3, 4호기 건설 추진), 영국(시즈웰C 건설 추진)가 대표적입니다. 또 유럽의 원전 하면 이 나라를 빼놓을 수 없죠. 바로 전통의 원전 강국 프랑스인데요. 마크롱 대통령에 지난해 원전 6기를 2035년까지 새로 건설하겠다고 발표했죠. 원전 의존도를 낮추려던 기존 정책을 완전히 뒤집고 ‘원자력 부활’을 선언한 건데요.
원전을 새로 짓는다고 할 때 가장 큰 걱정거리는 뭘까요. 자칫하다간 공사기간이 예상보다 훨씬 길어져서 돈과 시간이 모두 엄청 깨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원래 원자력 발전은 다른 재생에너지보다 생산단가가 저렴한 게 큰 장점인데, 공사 비용이 무지막지하게 불어나면 이런 장점이 사라지니까요. 특히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선진국일수록 이 부분에 대한 우려가 크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프랑스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원자로 만들 용접공이 없다?
전직 경찰관이었던 아르도 듀푸이는 프랑스 부르고뉴 시골 공장에서 용접 견습생으로 일합니다. 프랑스전력공사(EDF) 자회사가 운영하는 이 공장에서 훈련을 받으면 그는 원자력 용접공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원자력 용접공은 지금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직업 중 하나입니다.
현재 프랑스에 원자력 관련 용접을 할 수 있는 훈련된 용접공은 500명에 불과합니다. 오죽하면 지난해 원전 수리를 위해 미국에서 용접공 100명을 불러왔을 정도였죠. EDF는 2030년까지 이 인력이 두배로 늘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기초적인 용접교육에만 9개월이 걸리고, 실제 복잡한 작업을 수행하게 되려면 5~7년의 경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뚝딱 인력을 길러낼 수 있는 게 아니란 거죠.
부족한 건 용접공만이 아닙니다. 원전 6기 건설 계획을 실행하려면 엔지니어와 프로젝트 감독자, 보일러 제작자와 전기 기술자 등 총 10만 명의 인력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게 프랑스 정부의 계산인데요. 프랑스가 이렇게 큰 규모의 원전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1970년대 이후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원전 건설의 생태계가 무너진 거죠. 프랑스 여당 소속 의원 앙투안 아르망은 FT에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큰 도전은 대규모 산업 프로젝트를 조율할 방법을 알고 있느냐는 겁니다. 유럽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이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건) 중국, 인도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원전 건설 작업이 과연 속도를 낼 수 있을까요. 프랑스 정부가 계획대로 예산을 따내고 준비작업을 착착 진행해도 새 원전 착공은 2027년 말에나 될 텐데요. 겨우 8년 만에 공사를 끝마치고 2035년에 가동을 시작하겠다? 너무 낙관적이란 지적이 나오는데요.
사실 프랑스나 미국 원전기업은 고질적인 비용 초과와 납기지연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EDF 컨소시엄이 짓고 있는 영국 힌클리포인트C 원전은 당초 2023년 완공을 목표로 했지만 공사 지연으로 2028년 9월로 미뤄졌습니다. 그 결과 180억 파운드라던 건설비용도 327억 파운드로 불어났고요. 앞서 소개한 핀란드 올킬루오토 역시 EDF의 대표적인 공사지연(무려 17년 걸림) 사례입니다.
한국의 경쟁력, 그리고 걸림돌
정리하자면 침체에 빠졌던 전 세계 원자력 발전 시장에 다시 활력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원전 르네상스’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인데요. 다만 독일 사례에서 보듯이 모든 국가가 똑같진 않습니다. 참고로 리투아니아, 이탈리아는 일찌감치 원자력 발전을 중단했고요. 벨기에∙스페인∙스위스도 약 10년 안에 단계적으로 원전을 폐쇄한다는 계획입니다. 그렇다 보니 원전 찬성론자와 반대론자가 각각 자기 입맛에 맞는 해외사례를 끌어와서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요.
그래도 전 세계 원전 건설 총량이 다시 늘어나는 분위기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트렌드가 달라지긴 한 거죠. 그리고 원전이라는 게 시공능력을 갖춘 나라가 얼마 없습니다. 미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중국, 그리고 한국 정도이죠. 특히 요즘엔 신냉전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고 하죠. 그동안 원전 수출시장을 꽉 잡고 있던 러시아와 중국이 주춤한다면 혹시 한국에 기회가?
한국 원전산업의 가장 큰 경쟁력이라면 시공능력입니다. 한마디로 공사 납기를 비교적 잘 맞추는 편입니다. 예상 비용을 초과하는 정도도 덜해서 가격 경쟁력도 높다는 뜻이죠. “한국은 국내외에서 원전 31기를 건설한 노하우를 축적했고, 경수로 타입 신형 원자로의 공사기간 준수 역량도 탁월하다. 반면 미국과 프랑스는 ‘코스트오버런(비용 초과)’으로 시장 신뢰도가 훼손됐다”는 게 황성현 유진투자증권 연구위원의 평가입니다.
물론 원전 수주에는 그 나라의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이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무조건 싸게 잘 만든다고 따낼 수 있는 그런 계약이 아닌 거죠. 국가 간 외교전이 수주 경쟁의 핵심 변수인데요. 이 부분에선 우리가 미국∙프랑스에 당연히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지난해 10월 한국형 원전(APR1400) 원천기술에 대해 지식재산권 소송을 제기하며 발목을 잡고 있고요. 수주까지 갈 길이 꽤 험난해 보입니다.
1970년대 이후 거의 50년 만이라는 원전의 르네상스. 한국이 모처럼의 기회를 잡게 될까요. 아니면 들러리만 서다 말게 될까요. ‘잭팟 터진다’는 기대에 마냥 부풀기에도, ‘김칫국만 마신다’는 비관론에 빠지기에도 아직은 이른 듯합니다. By.딥다이브
에너지 이슈는 우리 삶에 너무나 중요합니다. 정치적으로 내 편, 네 편을 따지는 대신 실제 세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냉정하게 따져볼 문제인데요. 막상 원전을 이야기할 땐 ‘찬성이냐 반대냐’, ‘누구 편이냐’부터 따지고 반대쪽 이야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분위기라서 좀 답답합니다. 그래도 중요한 문제라서 한번 살펴봤는데요. 주요 내용을 정리하자면
-독일은 원자력 발전을 끝냈고, 핀란드는 새 원전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나라마다 상황이 제각각이긴 한데요. 전 세계를 놓고 보면 오랜 침체에 빠졌던 원자력 발전 시장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2050년 탄소 중립’이란 목표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높아진 에너지 안보 위기감도 작용했습니다. -선진국에서 원전을 새로 짓는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수십년 만의 대규모 프로젝트라 인력도, 노하우도 부족합니다. 자칫 공사기간만 길어지고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공능력 면에서 뛰어난 K-원전에 기회가 오지 않을까요? 경쟁력은 분명하지만 원전 수주는 외교전이라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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