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오카네, 머니. 세상 그 누가 돈에서 자유로울까요. 동전도 지폐도. 돈은 뒤집어서 봐도 돈일 뿐입니다. 그래도 돈 뒤에 숨겨진 이야기는 있습니다. 은행, 보험사, 카드사. 그리고 이들을 감독하는 금융당국을 출입하는 기자가 돈의 행간을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
돈의 뒷면, 오늘은 국내 주식 시장에서 최근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 이후에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펀드의 움직임을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상속세를 위한 재원이 필요했던 한미약품그룹의 오너 일가에 백기사로 나선 사모투자펀드(PEF) 운용사와 관련된 이야기인데요.
최근 한미약품그룹 오너 일가는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한미약품그룹의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의 주식 11.6%(3200억 원 규모)를 ‘라데팡스 파트너스’에 넘기기로 했습니다.
거래가 마무리되면 송영숙 한미약품그룹 회장은 한미사이언스 지분율이 11.7%에서 2.5%로 떨어지고 라데팡스 파트너스가 11.6% 지분율의 주요 주주로 올라서게 됩니다.
국내 대표적인 제약기업의 지배구조에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셈인데 라데팡스 파트너스 측은 경영권 공동보유 약정을 통해 송 회장의 경영권이 계속 유지되는 거래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주목받았던 행동주의 펀드가 일정한 지분을 확보한 뒤에 기업가치 상승을 위해 이사회·경영진에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인데요.
흥미로운 사실은 라데팡스 파트너스를 이끄는 김남규 대표가 한진칼과 경영권 대결을 벌였던 KCGI에서 최고전략책임자(CSO)로 일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김 대표는 당시 박빙의 경영권 대결이 가능할 수 있었던 핵심 요소인 이른바 ‘3자연합’(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반도건설-KCGI)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요.
투자은행(IB) 업계에서는 김 대표가 틀을 짠 이번 한미약품그룹에서의 거래가 국내 재계에서 기업승계에 따른 지배구조 이슈와 거액의 상속세를 둘러싼 문제 등을 해결하는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을지를 주목하는 모습입니다.
● 사모펀드 운용사 ‘라데팡스 파트너스’가 한미약품그룹 주요 주주로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라데팡스는 지난 2일 송영숙 회장과 장녀 임주현 한미약품 사장이 보유한 한미사이언스 지분 11.6%(811만538주)를 3200억 원에 인수하는 계약(SPA)을 체결했습니다.
라데팡스와 라데팡스가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 코러스유한회사가 나눠서 지분을 인수하는 구조로 이달 중에 프로젝트 펀드 결성을 마무리 짓고 거래를 완료할 계획이라는 설명입니다.
이번 거래가 완료되면 송영숙 회장 지분율은 11.7%에서 2.5%로, 임주현 사장 지분은 10.2%에서 7.8%로 줄어들게 됩니다.
오너 일가인 임종윤 사장(9.9%)과 임종훈 사장(10.5%)의 지분율은 그대로입니다만, 사모펀드 운영사인 라데팡스가 11.6%의 지분을 보유한 주요 주주로 올라서는 굵직한 거래입니다.
● “공동보유 약정으로 백기사 역할”… 이례적 거래 평가
다만, 라데팡스 측은 자신들이 주요 주주로 올라선 이후에도 송 회장의 경영권이 변함없이 유지된다는 입장인데요.
법률적으로 명확한 공동보유 약정을 체결해 송 회장의 백기사이자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IB업계에서 이번 거래가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보는 이유인데요.
사모펀드 운용사는 통상적으로 지분과 경영권을 모두 인수하는 바이아웃(Buy-out) 전략을 추구하거나 소수 지분 투자를 통해 재무적 투자자(FI)로 합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번 거래는 지분을 매각한 대주주와 동행하는 형태로 설계가 됐습니다.
라데팡스 파트너스 측에서는 한미약품그룹의 지배구조 및 사업구조 재편, 신시장 개척 및 신성장동력 확보는 물론 주주가치 증진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면서 송 회장과 협력하겠다는 계획입니다.
● “스트롱 인게이지먼트 펀드… 이미 기업경영에 자문 역할”
이 같은 방향성은 최근 주목 받았던 행동주의 펀드가 주로 기존 대주주나 이사회에 대한 공격적인 주주제안에 주력해온 것과는 상당히 다른 행보인데요.
이에 대해 라데팡스 측은 기업 경영에 강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스트롱 인게이지먼트 펀드’라는 개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행동주의 펀드가 주주 제안이나 위임장 대결처럼 공격적인 방식으로 대주주·이사회와 맞서면 단기적인 주가 상승을 이끌어낸 사례가 있었지만 회사의 경영방식과 주주환원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서는 한계도 보여줬다는 것인데요.
실제로 라데팡스는 한미약품그룹과 2년 이상 계속 소통하면서 기업의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투자에 나서기 전인 지난해 정기주총에서 사외이사를 추천해 실제 선임됐고 사내경영의 핵심인 전략기획실 구축까지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기존 펀드들과는 전혀 다른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데요.
대부분의 행동주의 펀드가 경영 참여를 위해 사외이사 선임을 시도하지만 낮은 지분율의 한계 등으로 실제 성공한 사례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의미가 큰 부분입니다.
금융인이 아니라 삼성전자 법무실 출신으로 삼성전자의 ‘메디슨’ 인수 후 통합 작업 등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김남규 대표는 송영숙 회장의 신뢰를 바탕으로 기업의 성장에 집중하는 이 같은 전략을 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국내 상장사들, 승계 과정에서 지분 상속세 문제로 ‘골머리’
사실, 이번 한미약품그룹과 라데팡스의 협력은 국내 상장사들이 주식시장에서 기업가치를 인정받는 이슈와 관련해서 안고 있는 문제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른바 오너 기업에서 지분 상속 이슈가 발생했을 때 최대 60%에 이르는 상속세 부담을 지게 되는 것인데요.
이런 상황은 국내의 일부 상장사들은 자신들의 기업 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높아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아니냐는 ‘합리적인 의심’을 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미약품그룹 역시 창업주인 고(故) 임성기 회장이 2020년 8월 별세하면서 부인과 자녀들이 5400억 원가량의 상속세 부담을 지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송 회장 등은 세금을 5년 동안 나눠서 내는 연부연납을 선택하고 주식담보대출 등으로 상속세를 납부하던 상황이었지만 결국은 주식을 팔아서 상속세를 마련하되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이번 거래에 나선 것입니다.
● 행동주의에 이어 경영참여까지 나서는 펀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법 될까
최근 관심을 모은 국내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은 이들이 시세 차익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 아냐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주주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당한 기업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에 상속세 부담을 해소하려는 경영진의 동반자로 나서면서 기업경영에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펀드까지 등장한 것인데요.
결국 개인 투자자들에게는 이런 활동들이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냐는 점이 관심이겠습니다.
대주주와 동행하되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개념의 ‘프렌들리 인게이지먼트 펀드’, ‘스트롱 인게이지먼트 펀드’를 내세운 라데팡스 역시 펀드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수익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매입한 주식의 가치가 올라야 하는 것인데요.
회장 직속으로 신설된 전략기획실을 중심으로 사업구조 재편을 통해 한미약품그룹의 경쟁력 강화에 나서는 한편 적정한 수준의 배당을 포함한 주주환원 요구도 이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해외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자면 홍콩에 본사를 둔 행동주의 펀드 ‘오아시스 매니지먼트’가 일본 닌텐도 투자 이후에 모바일 게임 출시를 적극적으로 압박해 ‘포켓몬 고’ 게임 출시를 이끌어 내고 투자 수익을 극대화한 경우 등이 유명한데요.
주식 투자와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에 관심이 있는 독자분이라면, 해외보다 가족경영 형태의 지배구조 비중이 큰데 상속세율은 매우 높은 국내 기업 환경을 감안한 라데팡스의 펀드 운용 전략이 실제로 성과를 낼 수 있을지 한번 지켜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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