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더쿠’는 한 가지 분야에 몰입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가장 깊게 빠진 영역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유튜브 등 SNS를 활용해 유명세를 탄 직장인이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인플루언서로 변신하는 모습은 이미 익숙하다. 하지만 인플루언서가 되면 퇴사를 하는게 ‘국룰’일까? 여기 예외적인 사례가 있다. 11만 팔로워를 보유한 먹스타그램 ‘피그웨이브(@pig_wave)’ 운영자인 4년차 직장인 박신용 씨가 그 주인공. 그는 2019년 이랜드 그룹 F&B 컨설턴트로 직장생활을 시작해 지난해 도넛으로 유명한 노티드를 운영하는 외식기업 GFFG의 브랜드 기획자로 이직했다. 잘 키운 부캐 덕분에 F&B 업계 이직 시장의 ‘대어’로 불렸을 정도로 본캐까지 승승장구한 케이스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자신의 브랜드가 공고해지고 있으니 ‘이쯤이면 직장을 관둘까’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한데 박 씨는 단호하다. 그는 “박신용이 키워낸 피그웨이브로 다시 박신용을 키워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본업과 부업의 선순환을 만들어 내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점이 모이면 선이 된다
지금은 외식업계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한 명이 됐지만 사실 박신용 씨는 꽤 오랫동안 ‘하고 싶은 게 없다’는 고민에 빠져 살았다. 2018년 취업 준비를 위해 이력서를 쓰면서도 막막하기만 했다. 잘 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이 대학시절을 보낸 결과였다.
하지만 눈앞에 닥친 취업난을 헤쳐가려면 입사 담당자를 혹하게 할만한 나만의 경쟁력을 찾아야 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일단 먼저 대학교 입학 후 해온 활동을 엑셀에 적어 내렸다. 인턴, 학회 등 굵직한 경험부터 일일 봉사, 단기 아르바이트 등 사소한 활동까지 모두 70여 개가 나왔다. 심지어는 학교 수업에서 발표한 내용까지 끄집어 낼 수 있는 기억은 다 끄집어 냈다. 그 결과, 점처럼 흩어진 활동들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주제는 ‘F&B’였다.
그는 학창 시절 몸담은 마케팅 학회에서 교내 분식집의 매출 성장 컨설팅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학회 활동 중에는 서울대학교에 진행된 학술 대회에 논문을 출품하기도 했는데 당시 주제가 ‘플레이팅에 따른 고객의 인식 차이’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경험한 7번의 아르바이트도 모두 족발집, 삼겹살집, 함박스테이크집 등 음식점이었다. 의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록하기 전까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공통점이었다.
박 씨는 “좋아하는 일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디에 돈과 시간을 많이 쓰는지 살펴 보는 것”이라며 “F&B라는 뾰족한 키워드를 찾고 나니 자소서 쓰고 면접 준비를 하는 과정이 훨씬 수월해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결과, 2019년 12월 그는 이랜드그룹 F&B 컨설턴트로 입사했다.
'먹알못'의 고군분투기
F&B 컨설턴트의 기본 덕목은 ‘먹잘알’이다. 음식 유행에도 민감해야 하고 인기 있는 가게들의 메뉴 구성과 플레이팅, 서비스까지 꿰뚫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입사 전까지 신용 씨에게 맛집은 ‘맛있는 음식점’에 불과했다. 이 업장이 성공한 까닭이라거나 고객이 많은 이유에 대해 깊이 분석하지 않았다. 입사 초기 팀 선배들이 각종 레퍼런스를 술술 읊을 때, 그는 입도 벙긋 못했다.
절대적인 경험 부족을 메우려면 공부가 필수였다. 입사 후 박씨는 점심 한 끼를 먹더라도 해당 음식의 차별점과 보완점을 찾는 것은 물론 매장 운영의 개선점까지 연구하며 밥을 먹었다. 예컨대 철판 스테이크 기름이 튀는 것에 불편을 느낀 후 철판에 종이 띠를 두르는 방법을 떠올리는 식이다.
그는 단순히 아이디어를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메모 앱 ‘에버노트’에 그때그때 떠오른 아이디어를 기록했다. 또한 아이디어를 실제 업무에 적절히 활용하기도 했다. 한 가게를 가더라도 테이블의 수, 음식이 나오는 속도 등까지 꼼꼼하게 메모했기 때문에 경쟁사의 이점을 분석하거나 자사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었다.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활동의 힘을 느낀 박 씨는 2020년 2월 ‘피그웨이브’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며 기록 채널을 에버노트에서 인스타그램으로 옮긴다. 에버노트에 기록해 저장해 놓은 콘텐츠들의 용량이 늘면서 월 업로드 용량(60MB)를 초과한 것이 기록 매체를 옮긴 가장 큰 이유였다. 에버노트의 경우 월 업로드 용량을 초과하면 한 달에 1만원 정도의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신입사원 입장에서 월 1만원도 크게 느껴졌기 때문. 또한 에버노트에 정리를 하면 박신용 개인만의 기록이 되지만 인스타그램을 활용하면 남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장점도 인스타그램을 선택한 이유다. 그렇게 박신용을 인플루언서로 만들어 줄 ‘피그웨이브’ 계정이 탄생했다.
[아주 사소한 궁금증]
Q. 왜 피그웨이브인가?
A. 계정을 만들 때, 맥주 ‘빅웨이브(Bigwave)’를 마시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빅웨이브’로 이름을 정했는데 계정이 점점 커지면서 사람들이 더 직관적으로 음식과 관련된 계정으로 인지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B에서 한 획만 빼도 P, Pig가 되길래 ‘이거다’ 싶었다. 돼지의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간다는 느낌, 좋지 않나?
Q. 경험한 모든 활동을 기록했는데도 도저히 내가 좋아하는 일을 못 찾겠으면 어떡하나?
A. ‘경험’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사소한 활동들까지 모두 살펴야 한다. 친구 따라 다녀온 일일 아르바이트까지 모두 기록해 보자. 어떤 영역의 활동이었고, 나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렇게 해도 모르겠다면 ‘일’과 관련되지 않은 취미 활동에서 업을 찾는 것도 좋다. 나도 농구를 좋아해서 KBL(대한농구협회)로의 취업도 고민했었다.
맛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법
당시 먹스타그램은 이미 레드 오션이었다. 하지만 피그웨이브는 개설 1년 만에 팔로워 1만 명, 다음 1년 동안 10만 명을 추가로 확보했다. 이미 포화 상태인 시장에서 그는 어떻게 팔로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을까?
원래 유명한 사람이 계정을 개설한 것이 아니라면 대중의 눈에 띄기 위해선 ‘알고리즘의 선택’이 필수이다. 이는 인스타그램뿐만 아니라 유튜브, 틱톡 등 콘텐츠 플랫폼이라면 모두 통용된다.
신용 씨는 이를 알기 위해서 알고리즘이 택한 콘텐츠를 분석했다. 인스타그램의 탐색 탭, 이른바 ‘돋보기’는 인스타그램의 니즈를 여실히 드러낸다는 것이 박씨의 설명이다. 그는 돋보기를 보다가 눈에 들어오는 음식 사진이 있으면 모조리 캡처했다. 특히 스크롤을 내리다가 자기도 모르게 클릭하게 되는 콘텐츠에 집중했다. 무의식적으로 들어간 만큼 ‘진짜’ 끌리는 사진이라고 판단해서다.
그렇게 저장한 사진을 보면서 똑같이 찍는 연습을 했다. 휴대폰을 두 개씩 들고 다니며 하나로는 화면을 띄우고 나머지 하나로 촬영하는 식이다. 플레이팅은 물론이고 사진 구도, 화면 비율 등도 따라하며 이 사진 속 음식이 왜 맛있어 보이는지 연구했다. 그 결과, 여백 없이 음식으로 꽉 채웠을 때 더 맛깔스러워 보인다거나 한상 차림이 나와도 항공샷으로 전체를 찍기보다 메인 메뉴만 단독으로 찍는 게 클릭률이 높다는 것을 터득했다. 심지어 사이드 메뉴일지라도 해당 가게에서만 맛볼 수 있다면 이를 강조해서 찍는 식이다.
최근에는 인스타그램이 돋보기 탭에 숏폼 콘텐츠인 ‘릴스’ 구좌를 늘리는 것을 보고 영상을 함께 찍는 데 집중한다. 특히 역동적인 영상이 인기가 높다는 것을 파악하고 인위적으로 치즈를 길게 늘리는 등 큰 동작을 담았다. 흰 가래떡을 철판에 붓고 고추장 소스를 휘저어 접시에 크게 퍼주는 모습을 촬영한 떡볶이 집 영상은 조회 수 200만에 달한다.
인스타그램이 이미지 기반 SNS라고 해도 콘텐츠의 내용 역시 중요하다. 박 씨는 처음에 양질의 정보로 차별점을 두고자 했다. 삼겹살 리뷰에도 돼지 품종이나 찍어먹는 소금의 종류 등에 관한 정보를 넣었다. 자료 조사 때문에 10줄 내외의 글을 쓰는 데 2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먹스타그램 채널로 얻고자 하는 정보의 본질은 ‘맛’이었다.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명확한 사실을 깨닫고 나자 콘텐츠의 결이 바뀌었다. 이전엔 첫 문장을 ‘좋은 고기를 쓰는 집이다’고 썼으면 이제는 ‘입안에 넣자마자 육즙이 터져 나온다’는 식으로 바꿨다. 이후 ‘좋아요’ 수도 100개 단위에서 1000개 단위로 훌쩍 늘었다.
결정적으로 ‘찐’ 맛집을 발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박 씨는 포털 사이트의 평점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같은 평점은 맛뿐만 아니라 위생, 친절, 심지어는 주차 가능 여부 등을 복합적으로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발로 돌아다니면서 맛집을 발굴했다.
물론 검증하지 않고 찾아가기에 종종 실패하기도 한다. 하지만 ‘간판’에서 세월이 느껴진다면 웬만해선 맛있다는 꿀팁. 업력이 길다는 것은 한 자리에서 오래, 꾸준히 손님들의 발길을 붙잡았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설명이다. 박신용 씨는 노포의 간판을 중심으로 올리는 ‘노포조아(@nopo_joa)’라는 계정도 만들었다. 이 계정 역시 팔로워 1.6만 명을 모았다. 그는 “먹스타그램 계정에 ‘눈에 보기 좋은’ 자극적인 음식만 올라온다는 인식이 있다”면서 “믿고 먹을 수 있는 곳을 발견해 알리는 것도 먹스타그램의 역할이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퇴사 안 하는 인플루언서
“피그웨이브를 운영하면서 20kg이나 쪘어요.”
직장인으로서 ‘부캐’를 꾸준히 키워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신용 씨는 평일은 직장인 ‘본캐’로 살고, 주말 이틀 동안 몰아서 맛집을 다녔다. 팔로워를 모으려면 꾸준히 게시글을 올려야 한다. 계정 개설 초 주 7일 업로드를 목표로 했는데 음식점도 ‘많이’ 가야만 했다. 맛없는 곳은 올릴 수 없었기에 딱 7곳만 다닐 수도 없는 노릇. 한참 다닐 때는 하루에 13군데를 방문해서 말 그대로 하루 종일 먹은 날도 있다.
경험을 축적했다면 이제 콘텐츠로 풀어낼 차례. 문제는 주말에는 돌아다니는 것만 해도 벅차서 콘텐츠를 작성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평일에도 야근이 일쑤라 퇴근 후 글을 쓰기엔 무리였다. 결국, 신용 씨는 아침 출근길 지옥철에서 휴대폰을 꼭 붙잡고 글을 쓰고 사진을 편집했다. 사람들 틈에 부대끼는 게 피로했지만 ‘그때’가 아니고서야 도무지 따로 글 쓸 시간이 안 났다고 회상한다.
인플루언서 활동을 통해 버는 수익이 늘어나면서 채널 운영에 보다 집중하고 싶은 생각이 든 것도 사실. 실제로 신용 씨가 만나본 다양한 분야의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들의 대부분이 프리랜서였다. 회사를 다니면서 개인 채널을 운영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많은 힘을 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직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직장인 인플루언서가 전무하다는 점이 자신의 강점이 될 수 있겠다고 판단해서다. 박신용이 키워낸 피그웨이브를 바탕으로 다시 박신용을 키울 수 있다면 스스로 ‘대체 불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현실적으로 피그웨이브가 인스타그램 의존도가 높다는 것이 불안요소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덕과 업을 하나로
예상은 적중했다. 인스타그램 소개란에 적어둔 ‘음식을 좋아하는 회사원’이란 문구가 외식기업 채용 담당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개인 SNS 계정과 연동해 놓은 덕에 본업이 F&B 컨설턴트라는 사실도 자연스레 알려졌기 때문이다.
채널 운영 2년 차에 팔로워 10만 명이 넘어가자 여러 외식기업에서 이직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직장인 가운데 부캐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이도 많지 않을뿐더러 본업과 시너지를 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당시 그가 ‘어디’로 이직할지 심지어 ‘몸값’은 얼마인지까지 업계의 관심이 모였다. 체감상 FA에 나온 축구 선수의 기분이 상상이 갈 정도였다.
결국 신용씨가 향한 곳은 노티드, 다운타우너 등을 운영하는 외식기업 GFFG였다. GFFG 측은 임플로이언서(Employee+Influencer)의 이점을 적극적으로 살려주겠다며 적극적으로 영입 제안을 해왔다. 예컨대 피그웨이브를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서 가정간편식(HMR)을 출시하거나 팝업스토어를 진행하는 식이다.
박 씨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인스타그래머블한 공간과 음식 비주얼은 기획에 강점을 가진 브랜드인만큼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탁월하게 보여주는 신용 씨와의 시너지도 기대됐다. 그는 지난해 8월 GFFG 브랜드 기획자로 입사했다. 사람들이 ‘음식’으로 재미있어 할 지점을 찾아내고 싶다는 바람이다. 현재는 둥근 당면을 넓적하게 만들었더니 큰 인기를 끈 것처럼 사람들이 익숙한 재료를 더 맛있게 즐길 방법을 연구 중이다. 구독자 140만 명을 확보한 요리 유튜버 ‘취미로 요리하는 남자(취요남)’와 협업해 GFFG에서 운영하는 베이커리 브랜드 ‘애니오케이션’에서 샌드위치 팝업스토어를 기획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덕업일치’의 삶을 꿈꾸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몰라 헤매고는 한다. 겨우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도 잘 하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기도 하다. 신용 씨도 그랬다. ‘하고 싶은 게 없다’는 막막함 속에서 한참을 보냈다. 좋아하는 일을 겨우 알게 됐지만 남들보다 한참 뒤처졌다. 최소한 ‘남들만큼’이라도 하기 위해 시작한 피그웨이브가 자신을 더 넓은 길로 이끌어 줄 것이라곤 꿈에도 몰랐다. 지그재그로 삶을 걸어온 것만 같아 불안해 하는 젊은 구직자에게 신용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참을 돌아온 것 같아도 뒤돌아보면 결국 자신만을 궤적을 그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기 보다는 시간을 내 내가 어떤 분야에 시간과 돈을 쓰는지를 살펴보는 노력을 해보면 좋을 듯 합니다. 분명히 자신만의 길이 보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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