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건설업계]〈하〉 3년뒤 주택 수급불안 우려
전체 매입대금의 3분의 1 못내
금리-원자재값-인건비 치솟은 탓
1분기 주택 착공 작년보다 36%↓
경기 성남시 수정구 ‘성남복정1’에 위치한 3만여 ㎡ 규모의 공공택지. 지난해 5월 이 택지를 분양받은 A건설사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매입대금 약 3139억 원을 치러야 하지만, 1차 중도금 706억 원을 못 내고 있다. 이곳은 경기 위례신도시와 맞붙어 있는 데다 성남 구도심과도 가까워 알짜배기 택지로 통했지만, A사 자금난이 심화하면서 중도금을 마련하지 못한 것. 연체가 더 이어지면 A사는 택지를 반납해야 할 뿐 아니라 계약금 314억 원을 날려야 한다.
부동산 시장이 장기간 얼어붙으면서 한때 건설사에 높은 수익을 안겨주던 공공택지 개발부터 수도권 재개발·재건축 등 정비 사업까지 위축되고 있다. 향후 주택 공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허가·착공도 크게 감소하고 있다. 이대로 신규 주택 공급이 줄어들면 이르면 3년 뒤 집값 불안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4일 LH에 따르면 이달 17일을 기준으로 LH가 공급한 공공택지 중 건설사가 매입대금을 연체 중인 사업장이 전국 33개 필지로 나타났다. 이들 사업장에서 건설사가 연체한 금액은 총 6878억 원으로 전체 매입대금 2조461억 원의 3분의 1에 이른다. 이 추세라면 올해 건설사들의 공공택지 대금 연체액이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9536억 원)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건설사들이 이처럼 낙찰받아 놓은 공공택지 대금조차 못 내는 것은 금리가 크게 오르고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마저 치솟으며 수익성이 악화된 영향이 크다.
실제 최근 주택 인허가·착공 물량이 크게 줄어들며 주택 공급 위축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올해 1분기(1∼3월) 전국 주택 인허가 실적은 8만6444채로 전년 동기(11만2282채) 대비 23% 줄었다. 같은 기간 주택 착공 실적도 8만4108채에서 5만3666채로 36.2% 감소했다.
#1.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남성맨션 재건축 조합은 지난달 초 시공사 선정에 나섰지만 입찰에 참가한 건설사가 단 한 곳도 없었다. 지난해 1월 첫 입찰 이후 5번째 유찰이다. 조합은 건설사의 참여를 높이려 지난해 3.3㎡당 525만 원이던 공사비를 719만 원까지 높이고, 입찰보증금도 90억 원에서 50억 원으로 낮췄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지난해 11월과 올해 1월 실시한 3· 4차 공고에서 단독 입찰했던 롯데건설마저 입찰에서 빠졌다.
#2. 경기 평택시 고덕동 ‘평택고덕’ 공공택지(2만7000㎡)를 낙찰받은 B건설사는 2019년 이 택지를 낙찰받을 때만 해도 아파트 분양 흥행을 자신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산업단지와 가까워 2018년 택지가 공급됐을 때 입찰 경쟁률이 207 대 1까지 치솟았었다. 하지만 3년 반이 지난 현재 B사는 착공조차 못 하고 있다. 자금 사정 악화로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택지 대금 130억 원을 연체 중이어서 사업이 사실상 중단됐다.
● 건설사 자금난으로 주택 공급 기반 흔들
24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부동산 경기 침체가 계속되고 고금리, 원자재값 인상으로 수익성이 악화하자 건설사들은 공공택지 개발 사업은 물론 통상 ‘알짜 사업’으로 여겨지는 서울 재개발·재건축 사업에도 등을 돌리고 있다.
서울 마포구 공덕역 인근 재건축을 추진하는 공덕현대아파트. 이곳 역시 역세권이라는 알짜 입지에도 최근 시공사 선정에 실패했다. 지난달 10일 조합이 설명회를 열었을 때만 해도 대형 건설사 6곳이 참여해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막상 신청받은 결과 DL이앤씨만 단독으로 입찰에 참여해 결국 유찰됐다. 현행법에 따르면 재건축 시공사 선정 시 입찰한 건설사가 1곳뿐일 땐 강제 유찰되며, 2회 이상 유찰된 경우에만 조합이 단독 입찰한 건설사와 수의계약을 맺을 수 있다.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인근 ‘청량리8구역’도 올해 두 차례에 걸쳐 시공사 선정 입찰에 나섰지만 롯데건설 1곳만 참여하며 모두 유찰됐다.
수도권 주택 공급에 핵심 역할을 하는 정비 사업이 위축되며 올해 1∼3월 수도권 주택 인허가 물량은 3만253채로 시장 호황기였던 2019년(1∼3월 7만7282채)에 비해 반 토막 났다. 통상 인허가 물량은 4∼5년 뒤, 착공은 2∼3년 뒤 준공 물량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감안하면 도심 주택 공급 부족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정부는 이달 15일 윤석열 대통령 주재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원희룡 국토부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부동산 점검회의를 열고 이 같은 상황을 진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 장관은 16일 기자간담회에서 “공급 기반이 급속하게 위축되고 인허가나 착공, 분양이 계속 미뤄지면서 이르면 3년 뒤 집값 폭등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주택 건축 수주액도 급감하고 있다. 대한건설협회에 따르면 올해 1∼3월 건설업체의 국내 주거용 건축 수주액은 11조7421억 원으로 전년 동기(17조7673억 원)보다 33.9% 감소했다.
실제로 주요 건설사들은 국내 신규 수주 목표치를 지난해 수주액보다 크게 낮춘 상태다. 지난해 국내에서 16조9000억 원의 신규 수주액을 올렸던 현대건설은 올해 목표를 10조8000억 원으로 낮췄다. 삼성물산도 지난해 국내 신규 수주액(11조5000억 원)보다 3조6000억 원 낮은 7조9000억 원을 목표로 했다. 지난해 13조7000억 원의 수주를 거둔 GS건설 역시 올해 신규 수주 목표를 9조5000억 원으로 낮췄다.
● 공공택지 대금 못 치르는 건설사들
중견 건설사들의 주된 먹거리였던 공공택지 개발 사업도 위축되고 있다. LH에 따르면 LH가 공급한 공공택지 중 건설사가 매각대금을 제때 못 낸 사업장 33개 필지 중 잔금 납부 기한을 6개월 이상 넘긴 사업장은 7곳이다. 이들 사업장은 택지 공급 계약 해지도 가능하다. LH가 계약을 해지하면 건설사는 공공택지를 반납해야 하는 것은 물론 공급 금액의 10%에 해당하는 계약금도 떼이게 된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공공택지 개발은 건설사들 사이에서 민간택지보다 낮은 비용으로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어 ‘로또’로 통했다. 추첨으로 뽑는 공공택지 낙찰 확률을 높이려 위장 계열사나 페이퍼컴퍼니(서류상 회사)까지 동원하는 ‘벌떼 입찰’이 성행할 정도였다. 하지만 사업 여건이 크게 악화하며 낙찰받은 택지조차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 된 셈이다.
이대로라면 자금력 있는 대형 시행·건설사만 살아남을 거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사업 여건이 좋지 않고 현금 동원력이 부족한 지방의 중소형 시행·건설사들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 대형 시행사 관계자는 “부동산 경기가 좋을 때 현금을 많이 확보해 뒀다”며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에 실패해 무너진 사업장 토지를 공매 등을 활용해 싸게 매입할 기회로 삼고 있다”고 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장기간 이어지면 향후 주택 수급 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안성용 한국투자증권 부동산팀장은 “공급 부족 문제가 지속되면 2∼3년 이후 수도권을 중심으로 집값이 급격히 상승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철근과 시멘트 가격을 안정화하는 등 시공사 부담을 덜기 위한 정부 역할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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