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번지는 역전세]
올해 전국 아파트 전세계약 47%가 ‘역전세’
6만건 계약 중 직전보다 전셋값 하락한 계약 3만건 육박
집주인, 내줄 돈 마련 막막… 세입자는 이사 못갈까 불안
대구 수성구의 30평형대 아파트(전용 84㎡)에 전세 사는 세입자 김모 씨(40)는 12일 전세 계약 만기일을 앞두고 속이 탄다. 두 달 전 집주인에게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문자를 보냈지만, 집주인은 “현금이 없어 집을 팔기 전까진 보증금을 내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전셋값은 2년 새 4억5000만 원에서 3억 원까지 떨어졌고, 전세자금 대출 이자로 매달 110만 원씩 나간다. 그는 “아이 학교 때문에 이사가야 하는데 전 재산이 전세금에 묶여 있다”며 “배째라 식의 집주인을 보니 막막하다”고 했다.
역전세난이 현실화하면서 올해 1∼4월 전국 아파트에서 전셋값 하락으로 집주인이 추가로 돈을 마련해 세입자에게 내준 전세보증금이 2조50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주인이 아파트 1채당 평균 8400만 원을 기존 세입자에게 내준 것이다. 역전세난이 이미 시작된 가운데 지방 아파트와 신축 빌라가 하반기(7∼12월) 역전세난의 뇌관이 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동아일보가 1일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등록된 올해 1∼4월(22만7844건)과 2년 전 같은 기간 계약(18만8469건) 중 단지·동·층·면적이 같은 계약 6만2835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 전체의 47%인 2만9508건이 직전 계약보다 전셋값이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2건 중 1건이 직전 계약보다 전셋값이 떨어진 것이다. 하락 계약의 전세금은 2년 새 총 2조4793억 원 줄었다. 채당 8402만 원꼴로 집주인이 대출을 추가로 받거나 본인 돈을 들여 이를 부담한 것이다.
입주 물량이 많거나 그동안 주택 공급이 누적됐던 지방에서 하락 계약 비중이 높았다. 대구는 전세 계약 1490건 중 하락 계약이 1218건으로 하락 계약 비중이 81.7%에 달했다. 세종은 784건 중 524건(66.84%)이 하락 계약됐다.
전세사기 온상으로 지목됐던 신축 빌라도 역전세난 심화로 추가 피해가 우려되고 있다. 동아일보 분석 결과 올해 말까지 전세 계약이 다가오는 신축 빌라(2020년 이후 준공 기준) 77.5%는 2년 전 입주 시 가격으로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가입이 불가능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2021년 5∼12월 전국 빌라 실거래 10만6728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다. 이들 신축 빌라는 전세금을 채당 약 5994만 원 내려야 반환보증에 가입할 수 있다.
송인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정보센터 소장은 “6월 이후 역전세난이 더 커질 수 있는 만큼 정부가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역전세, 대구 82% 인천 61%… 집주인들 평균 8400만원 돌려줘
“전세금 1억 낮춰도 세입자 못구해”… 집주인들, 대출도 어려워 전전긍긍 전셋값 고점 2021년 계약 잇단 만기 지방 중심 역전세난 더 심해질 우려 정부, 보증금반환용 대출 완화 추진
세종시 새롬동 새뜸마을 10단지 더샵힐스테이트(전용면적 84㎡)는 지난달 19일 전세 보증금 3억 원에 계약됐다. 2년 전(4억5000만 원)보다 1억5000만 원 떨어진 것. 이 단지 전셋값은 2021년 한때 5억6000만 원까지 상승했다가 최근 호가가 2억8000만 원까지 내려갔다. 인근 공인중개업소는 “전세 계약 만기가 된 집주인 대부분이 세입자에게 1억∼1억5000만 원을 내줘야 한다”며 “대출도 안 돼서 친인척에게 돈을 빌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다.
대구에서 임대사업을 하는 한모 씨(43)는 지난달 전세 계약이 끝난 대구 달서구 아파트(전용 59㎡) 전셋값을 2억8000만 원에서 1억 원을 낮춰 세입자를 겨우 구했다. 기존 보증금에서 부족한 돈은 적금을 깨고 추가 대출을 받았다. 더 큰 문제는 다음 달 전세 시세가 2년 전 2억6000만 원에서 1억5000만 원으로 내린 구축 아파트 전세 계약이 또 끝난다는 점이다. 에어컨, 신발장, 타일 등을 모두 바꿔주겠다는 광고까지 했지만 두 달째 세입자를 못 구하고 있다. 그는 “15년 넘게 임대사업을 하며 전세금 반환에 문제가 생긴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은행대출이 어렵다고 해서 걱정”이라고 했다.
전셋값 하락에 따른 역전세가 대규모 입주를 앞두고 있는 등 주택 공급이 많은 지방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특히 전셋값이 고점이었던 2021년에 맺은 계약들의 만기가 올해 하반기(7∼12월)부터 도래하기 시작해 앞으로 역전세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지방 아파트 역전세 심화
동아일보가 1일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신고된 올해 1∼4월 전국 아파트 전세 계약을 전수 분석한 결과 광역 지방자치단체 17곳 중 5곳은 전셋값이 2년 전보다 떨어진 거래 비중이 절반을 넘었다. 대구가 81.7%로 가장 높았고 세종(66.8%), 울산(56.4%), 대전(53.4%), 부산(52.8%) 순이었다. 수도권에서는 인천이 60.6%로 가장 높았고 경기 50.8%, 서울 46.3% 순이었다.
대구는 1채당 평균 8728만 원을 집주인들이 마련해 세입자에게 돌려줘야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세종은 평균 9309만 원, 서울은 1억2153만 원을 각각 내줬다.
문제는 역전세 현상이 더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전셋값이 고점이었던 2021년 5∼12월 전세 계약된 전국 아파트가 44만8347채로 이들 아파트의 만기가 순차적으로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임대차3법이 시행된 2020년 7월 전세실거래가지수는 110.3에서 2021년 5월 121.4로 급등해 같은 해 말까지 123∼127을 유지했다.
입주물량이 쏟아지는 것도 역전세난을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하반기 전국 입주물량은 23만1370채로 전년 동기(20만9172채) 대비 2만2198채가 더 많다. 특히 지방 분양 물량이 11만8805채로 전년 동기 대비 2만4534채 늘었다. 역전세가 심한 대구는 올해 하반기 물량만 1만7626채로 전년 동기보다 4000여 채 가까이 늘어난다.
수도권보다 전셋값이 비교적 저렴한 만큼 집주인의 부담도 더 크다. 대구 수성구 두산동 수성SK리더스뷰(전용 111㎡)는 이달 6억5000만 원에 전세 계약됐다. 2년새 전셋값이 23.5%(2억 원) 하락한 것. 울산 중구 우정동 선경2차 전용 59㎡는 2년 전 2억7000만 원에서 이달 2억 원으로 7000만 원 하락했다. 울산 중구 공인중개업소는 “집주인이 전셋값을 내려도 계약하겠다는 세입자가 없어서 전세금을 못 돌려주는 경우가 많다”며 “기존에 주택담보대출이 있던 집주인은 추가 대출이 안 돼 자금난에 처한다”고 했다.
● 정부 “임대인, 전세금 반환 보증 대출 완화 검토”
정부는 역전세가 심화되자 전세 보증금 반환 목적 대출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완화해주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 “전세금 반환 보증과 관련된 대출에서 선의의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며 “제한적으로 대출 규제를 완화하는 부분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전문가들은 대출규제 완화는 필요하지만 ‘선의의 집주인’을 가려낼 장치를 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준석 제이에듀투자자문 대표는 “담보 여력이 있어도 추가 대출을 못 받아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사례가 많은데 담보 범위 내에서 규제를 완화해줄 필요가 있다”며 “집주인뿐만 아니라 세입자가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역전세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안성용 한국투자증권 부동산팀장은 “추가 대출 규제는 건전성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며 “전셋값이 추가 하락할 수도 있는 만큼 제한적으로 완화해야 한다”고 했다.
역전세
전세 시세가 직전 전세 계약 때보다 떨어져 신규 세입자에게 받을 보증금으로 기존 세입자의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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