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더쿠’는 한 가지 분야에 몰입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가장 깊게 빠진 영역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Behind the scenes #1
“체라볼로 쁘띠 베르도(Ceravolo, Petit Verdot)가 좋을 것 같네요.” 스크린 너머로만 보던 와인 추천을 부탁하자 지체 없이 집어든 4만 원대 레드 와인 한 병. ‘근육질의 상남자’같은 와인이란다. 잔에 따르자마자 강하게 퍼지는 향과 입에 닿으면 고스란히 전해지는 풀 바디의 묵직함이 인상적이라고. 블렌딩할 때 주로 쓰인다는 품종 ‘쁘띠 베르도’로만 만들어진 와인 중에선 최고라며, 호주의 비옥한 붉은 토양(테라로사)에서 재배된 포도 덕분에 복잡한 향이 특징이라고 설명을 이어간다. 양고기와 궁합이 좋다며 페어링도 잊지 않고 전해준다.
휘황찬란한 형용사나 알 수 없는 외국어가 아닌 쉬운 우리말로 전해지는 와인 추천. 양갱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와인 디렉터 양갱TV’가 ‘와린이’들에게 호응을 얻는 이유다. 양갱TV의 구독자는 9만 5000명, 업로드된 영상은 300개가 넘는다. 구독자가 모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건 ‘총정리 꿀팁 영상’들이다. 그 중에서 가장 반응이 좋았던 건 ‘와인을 살 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10가지’다. 조회수 60만 회를 넘긴 이 영상은 양이나 색깔 혹은 라벨을 보고 피해야 할 와인을 가려내는 방법을 전한다.
그중 하나는 율러지(Ullage)로 판단하는 것인데, 율러지는 와인병을 세웠을 때 코르크와 내용물 사이의 공간을 뜻한다. 와인이 숙성되는 과정에서 내용물이 증발하게 되면 율러지는 커진다. 율러지가 큰 와인은 내부 손실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하니 피하라는 것이 양갱의 설명이다. 매대에 진열된 같은 제품을 여러 병 세워두고 비교하면 된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더라도 현장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팁이다.
또 다른 인기 영상 '샴페인의 모든 것 A to Z'에선 마실 때 놓치지 말아야 디테일을 전해준다. 병 입구의 튀어나온 부분 아래까지 포일을 제거하는 편이 위생적이라는 것처럼. 튀어나온 부분 위로만 포일을 제거하면 와인을 따를 때 포일 안으로 와인이 들어가, 다음 잔에 섞일 수 있기 때문에 보다 위생적으로 마실 수 있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전하는 것이다.
더불어 샴페인은 오픈할 때 병을 돌려도 결례가 아니며, 다른 이의 잔을 채워줄 때엔 레이블을 손으로 가리면 안 된다는 것도 강조한다. 양갱은 샴페인을 한 번에 따르면 거품이 많이 나오니 나누어서 잔에 따르고, 압력을 보다 잘 견디라고 만들어진 펀트(병 아래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를 잡고 따르면 지나쳐 보일 수 있다는 것도 넌지시 알려준다. 기포 터지는 소리를 듣기 위해 입보다 귀에 먼저 잔을 가져가야 완성된다는 허세 넘치는 에티켓은 덤이다. 와린이라도 샴페인 좀 마셔본 티 내는 데 10분이면 충분한 셈이다.
이 외에도 와인 마실 때 주의할 점, 편의점과 대형 마트에서 살 수 있는 괜찮은 와인 등을 소개는 영상들도 좋은 반응을 이끌어 냈다. 양갱은 이러한 호응과 공감을 자신의 콘텐츠가 심리적 장벽을 허무는 데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와인을 제대로 마셔보기도 전에 포기하려고 하거나 소심하게 취미를 이어가는 이들에게 양갱이 해결사로 통하는 이유다. 그런데 이 남자는 왜 해결사를 자처하는 걸까? 지식과 경험은 독점하고 있을 때 더 빛을 발하는 법인데. 힘들게 익힌 지식과 경험을 나누길 꺼리지 않는 이 남자. 그는 왜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친절을 베푸는 것일까?
Behind the scenes #2
국산이 아니라는 건 여러모로 불편하다. 경험하고 이해하는 데 제약이 많아서 그만큼 시간과 돈이 더 요구된다. 와인이 대표적이다. 낯선 이름과 다양한 종류 그리고 복잡한 맛. 많은 이들에게 와인은 어렵다. 그들이 각자 원하는 방식으로 와인을 즐기고 맛을 평가하는 자유를 스스로 박탈하고, 권위 있는 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이유다.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는 이들도 많다. 마땅히 대놓고 즐길 권리가 있음에도 그러지 못하는 이들이 안타깝다는 양갱. 그래서 그는 카메라 앞에서 아낌없이 자신의 경험을 나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와인을 마시면서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길 바라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이 와인을 즐기기까지,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에도.
와인이 없으면 하루도 살길 힘들 것 같다는 양갱. 와인과의 첫 만남은 로맨틱하지 않았다. 일로 만난 사이였으니까. 20여 년 전, 양갱은 강남의 한 레스토랑에서 매니저로 근무했다. 당시 레스토랑에서 와인에 대한 수요는 적지 않았다고 한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손님에게 와인을 설명해 줘야 할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와인을 모르니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 난처했다. 보다 나은 서비스를 하고자 했던 그는 와인을 직접 공부하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외국에서 만든 술에 대한 양질의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다행히 그의 직장은 와인에 대한 접근성이 나쁜 곳은 아니었고 여러 와인을 마셔볼 수 있는 기회는 충분했다. 더욱이 콜키지 서비스를 요청한 손님들 중에는 와인을 건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양갱에게 와인은 그저 맛없는 술일뿐이었다. 그래도 일이니까 꾸준히 와인을 마셨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손님이 서빙에 대한 답례로 건넨 ‘샤또 페리에르(Chateau Ferriere)’가 그의 인생을 바꿨다. 그 전까지 와인은 시고 떫은맛의 술이라는 생각했는데 이 와인은 그 생각을 바꿀 만큼 특별했다. 이전과 달리 더 마시고 싶을 정도로 술이 맛있었다. 포도로 만든 술에서 느껴지는 커피 향과 초콜릿 향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궁금했다. 양갱은 이날을 그동안 편식 없이 다양한 와인을 마시면서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깨우쳐 가던 감각이 열린 날로 표현했다.
그날 이후, 양갱은 레스토랑에서 소믈리에로 새로운 업무를 시작했다. 와인은 목적이 됐다. 학창 시절부터 공부에 별 뜻이 없었지만 자발적으로 학원을 찾아갈 정도로 와인에 대한 열정이 커졌다. 하지만 그 당시 학원들은 개인이 운영하던 곳이라 공신력이 없었고, 커리큘럼 또한 제각각이었다. 정제된 지식을 얻기엔 부족함이 많았던 것이다.
시중에 판매되는 책들도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 당시 구매했던 책 중 하나는 ‘현대인과 와인’. 400쪽에 가까운 책은 전문 용어로 가득했고 와인을 잘 모르던 당시의 양갱에겐 암호문이나 다름없었다. ‘포도가 아닌 다른 향이 나는 건 떼루아 때문이다’라는 불친절함은 차치하더라도 떼루아가 뭔지 모르니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궁금증과 함께 답답함은 계속됐다.
주변에 물어보려고 해도 폐쇄적인 업계는 나눔에 인색했다. 업계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도 양갱처럼 제한된 상황에서 와인을 공부하고 정보를 얻었기에 쉽게 공유하진 않았다. 무언가 알려준다 하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경우도 있었다. 폐쇄적이고 강압적인 분위기가 싫었던 것도 있었지만 양갱은 맛이란 주관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감각에 더 투자하기로 했다. 같은 레스토랑에서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과 함께 와인을 마시며 느낌을 공유했다. 비싼 와인은 함께 돈을 모아 마시기도 했다. 작은 모임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레스토랑에서 와인의 매출은 점점 올라갔다. 직접 마셔 본 와인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면서 추천에도 진심이 담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작은 그저 같이 마시고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정기적인 모임이 되면서 일종의 교육 세션으로 자리 잡게 됐다. 이 모임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본 남자도 있었다. 바로 양갱TV 운영을 지원하는 섭PD.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 생으로 일하다가 소믈리에 시절 양갱의 쉽고 유용한 설명에 감명받았던 그는 양갱에게 유튜브 채널 개설을 권유한 사람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양갱의 설명은 마치 동네 아는 형이 자신의 게임 비법의 핵심만 추려서 알려주는 것 같았다고. 섭PD는 양갱이 자신에게 말해주는 것처럼 와인을 설명한다면 일반 대중의 공감과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와인 업계에 몸담고 있었지만 새로운 유입을 막는 ‘고인물’들의 기득권 행사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양갱. 와인은 누구나 쉽게 마실 수 있는 술이라는 것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2018년 겨울 유튜브를 시작했다. 양갱TV에 영상이 처음 공개된 때는 2019년 2월이다. 2019년은 유튜브의 인기에 힘입어 와인 업계에 종사하는 여러 사람들이 개인 채널을 ‘파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국제와인기구(OIV)에서 와인 경영 석사 학위를 받은 김욱성 씨가 개설한 유튜브 채널 ‘김박사의 와인랩’이 대표적이다. WSET 디플로마*를 취득한 서울스쿨오브와인학원 대표 정아영 씨가 자신의 채널 ‘제인 와인 하우스’에 첫 영상을 공개한 때도 2019년이다. 다양한 경험은 물론 특정 교육 과정과 시험을 통과하며 쌓은 전문성으로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채널들이었다. 구독자가 유일한 판단 기준은 아니지만 이중에서 현재 가장 많은 구독자를 보유한 채널은 양갱TV다.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양갱은 스스로를 와인 전문가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먼저 경험한 사람이자 진입 장벽을 낮추고 안내하는 가이드로 정했다. 양갱이 촬영할 때 전문 용어 사용을 지양하고 넥타이도 매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다. 고급스러움이나 격식 같은 ‘와인 뽕’을 최대한 빼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함께 즐기는 것에 초점을 맞춰왔다. 물론 다른 와인 유튜브 채널들이 ‘꼰대’처럼 전문 용어를 남발하며 가르치려는 태도로 일관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양갱은 혼자 공부하고 경험했기에 그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고, 일반 대중의 시선에 더 가깝게 와인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양갱은 자신의 지난 경험과 지향점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여러 와인 전문 채널들 사이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로 꼽았다.
와린이의 시선에서 전하는 이해하기 쉬운 콘텐츠가 공감을 이끌어내면서 양갱의 팬덤은 점차 커져갔다. 이와 함께 양갱의 저렴한(?) 추천이 불편했던 이들도 등장했다. 업계에서 양갱은 2~3만 원대의 와인만 마시는 사람이는 소문도 돌았을 정도로 그는 저렴하면서도 맛있는 와인 위주로 추천을 많이 했다. 특히 단 맛이 강하고 자극적인 것들로. 그는 “커피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아메리카노부터 마시라고 하면 커피는 쓴 음료라는 생각에 멀리하게 될 수 있으니, 믹스 커피부터 권하는 것도 방법이다"라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일단 맛이 있어야 다시 찾게 되고, 자주 마시다 보면 성장하게 될 테니 처음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양갱의 생각은 의도치 않은 논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약 2년 전, 그는 코스트코에서 초심자가 살만한 와인으로 코넌드럼(Conundrum)을 꼽은 적이 있다. 3만 원대의 미국 와인을 두고 양갱은 향이 진하고 잔당감이 있으며 위스키 뉘앙스도 느껴진다며 추천했다. 참고로 코넌드럼 추천 영상은 제작비를 일부 지원받아 제작됐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양갱의 영상이 공개된 이후 같은 와인을 리뷰했던 다른 유튜버의 콘텐츠에선 혹평이 가득했다. 그 영상 속 혹평을 전한 이는 와인 업계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는 마스터 오브 와인(Master of Wine)의 자격을 획득한 인물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어떻게 권위자에게 혹평을 받은 와인을 추천할 수 있냐며 양갱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유료 광고가 포함된 영상이라도 지나쳤다는 반응도 있었다. 광고를 떠나 취향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 양갱은 반박 영상을 올리기도 했지만 얼마 후 그 영상을 삭제했고, 사과 영상을 통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화를 표출했던 자신의 행동이 경솔했음을 전했다.
양갱은 지금도 대형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맛있고 저렴한 와인을 소개한다. 그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또한 양갱TV는 처음부터 와린이의 성장을 위한 채널로 기획했기에 “앞으로도 떫은맛보단 단 맛이 두드러지며 주변에서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와인을 통해 와인을 보다 쉽게 즐길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채널을 통해 와인의 세계에 입문한 이들이 와인의 맛과 향을 섬세하게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게 되면 억지로 그들을 붙잡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맛에 대한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답은 없다고 말하는 양갱. 하지만 그는 예나 지금이나 와인은 함께 마실수록 더 즐거운 술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그는 앞으로도 낮은 곳에서 와인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허물고 더 많은 이들이 인생의 새로운 즐거움을 찾을 수 있도록 친절한 길잡이를 자처하고자 한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어렵고 때론 겁이 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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