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 동작구 상도동 빌라를 2년 전인 2021년 매도한 이모 씨는 최근 1년 넘게 법원을 들락거리고 있다. 세입자가 새 집주인에게 전세 보증금을 떼이자 ‘이 씨가 집주인이 바뀐 걸 알려주지 않았다’며 이 씨를 상대로 보증금 반환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 씨는 1, 2심 모두 패소했다. 세입자가 집주인이 바뀐 것을 안 이후 상당 기간 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판례에 따른 것. 결국 새 집주인에게 전세금을 받아주기로 세입자와 합의한 그는 이제 새 집주인을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최광석 로티스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역전세와 전세사기가 불거지면서 법적 분쟁을 벌이는 세입자가 늘고 있다”고 했다. #2. 서울 강동구 천호동의 빌라를 세 놓은 정모 씨는 최근 내용증명을 받았다. 전세 계약 만기가 아직 3개월 남았는데 세입자가 별다른 연락도 없이 내용증명부터 떡하니 보낸 것. 그는 “전세금을 내줄 여력이 있는데 세입자가 아무 말도 없이 내용증명을 보내서 당황했다”며 “나 역시 전세계약 종료일 오후 11시 59분에 전세금을 돌려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세입자가 새로 이사갈 집에 잔금을 치를 수 있게 통상 낮에 내주는 전세금을 ‘원칙대로’ 계약 종료일 밤늦게 반환하겠다는 것이다.
전셋값 하락에 따른 역전세난으로 전세시장에서 집주인과 세입자 간 불신이 커지면서 법적 분쟁이나 갈등이 확산되고 있다.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계약 종료 의사를 내용증명으로 통보하는 게 관례가 되고 집주인은 세입자에게 전세금 일부를 나중에 주겠다고 버티는 일도 잇따르고 있다. 2020년 7월 임대차법 시행 이후 전셋값이 급등하면서 늘어났던 집주인과 세입자 간 분쟁이 다시 되풀이되고 있다.
26일 대법원 등기정보광장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아파트와 빌라 등 집합건물에 대한 임차권 등기명령은 1만5009건으로 이미 지난 한 해(1만2038건) 수준을 넘어섰다. 임차권 등기는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가 이사를 간 뒤에도 보증금을 우선 변제받을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신청한다. 그만큼 보증금을 떼일 우려에 법적 조치를 취하는 세입자가 많아진 것이다.
집주인과 세입자 간 내용증명을 보내는 것도 관례화되고 있다. 서울 구로구 구로동의 한 2룸 빌라 세입자 A 씨는 집주인에게 계약 종료를 통보하는 내용증명을 보냈지만 집주인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사 갈 집 주인이 이를 알게 돼 “이사 지연으로 피해가 발생하면 손해를 배상해달라”는 내용증명을 A 씨에게 보냈다. A 씨는 “전세 사는 친구들은 집주인이 잠적할까 봐 대부분 내용증명을 먼저 보낸다”고 했다.
과거 호혜적이었던 집주인과 세입자 간 관계가 적대적으로 바뀌면서 이사 시기를 맞추려고 2, 3개월 정도 전세 기간을 조정하거나 세입자가 이사 갈 집 계약금으로 쓰도록 보증금 일부를 먼저 돌려주는 관행도 사라지고 있다. 서울 금천구에서 임대사업을 하는 B 씨는 세입자를 구하기 힘들어 3개월 정도 더 거주해달라고 물어봤는데 단칼에 거절당했다. 이후 세입자는 ‘전세 계약 만료 시점에 바로 이사할 것이고, 만약 보증금이 반환되지 않으면 바로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전세금 반환 신청을 하겠다’는 내용증명을 보냈다.
집주인이 밀린 세금이 없는지 확인하는 세입자도 많다. 국세청에 따르면 올해 4, 5월 세입자가 집주인의 미납 국세를 확인한 건수는 총 2372건에 이른다. 지난 한 해를 통틀어 세입자의 집주인 미납 국세 확인 건수가 159건에 그쳤는데, 올해 4월 집주인 동의 없이도 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자 그 수가 급증했다. 떨어진 전세금 일부를 나중에 받게 되면서 집주인에게 차용증을 요구하는 세입자도 생겨나고 있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매매시장 침체로 집주인이 집을 팔아 전세금을 변제하기도 쉽지 않은 만큼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송인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정보센터 소장은 “보증금을 월세로 전환할 경우 세입자에게는 세액공제를 확대하고, 집주인에게는 세제 혜택을 주는 등 월세 유도 정책으로 임대차시장의 근본적인 체질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고 했다.
‘역전세’ 전세금 반환대출, 특정기간에만 한시 완화 검토
보증금 차액만큼 DSR 규제 완화 내주 발표 경제정책방향에 포함될듯
정부가 올 하반기(7∼12월) 본격화될 것으로 우려되는 역전세에 대비한 집주인에 대한 전세금 반환 목적 대출 규제 완화를 특정 기간에만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26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다음 주에 발표할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 이 같은 내용의 전세 반환 대출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완화 방안을 담을 것으로 알려졌다. 기재부가 정책 윤곽을 제시하면 금융위원회 등이 세부 대책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8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전세금 반환 목적에 한해 DSR 완화 방침을 밝히면서 “일정 기간 전세금 반환 목적의 대출에만 한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19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보증금 차액에 대해 다음 계약 기간 때까지만 DSR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며 “이런 완화는 길어야 1년 정도 운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정부 내에서는 전세보증금 차액에 대해서만 DSR 규제를 완화하고, 특정 기간 계약된 임대차에만 적용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갭투자에 나선 집주인이나 대폭 올려받은 보증금을 다른 투기 등에 활용한 집주인도 구제받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특히 전셋값이 고점을 찍은 2021년 말∼2022년 초 체결된 임대차 계약을 중심으로 규제를 풀어주는 방안이 거론된다.
정부는 다음 세입자를 보호하는 장치도 함께 검토 중이다. 추 부총리는 18일 방송에 출연해 “다음 세입자가 선순위 대출에 걸리지 않도록 집주인이 전세 반환 보증을 받도록 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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