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 타격에 옥수수-대두 가격 뛰어
장바구니 물가 부담 더 커질듯
“이상기후 리스크, 과거보다 커져”
한국 정부가 좀처럼 잡히지 않는 ‘끈적한 인플레이션(sticky inflation)’과의 전쟁을 벌이는 가운데 ‘슈퍼 엘니뇨’라는 복병을 만났다. 올여름 2016년 이후 7년 만에 찾아온 역대급 엘니뇨로 곡물 생산이 타격을 입으면 물가가 다시 들썩일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가뜩이나 식량 공급망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상기후 리스크까지 겹치면 국민의 장바구니 물가 부담이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세계 주요 기관들은 앞다퉈 올여름 이후 강력한 엘니뇨를 예고하고 있다. 엘니뇨는 동태평양과 중태평양의 해수면 온도가 0.5도 이상 올라가 수개월 동안 지속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미국 해양대기청(NOAA)은 “엘니뇨가 겨울까지 지속될 확률이 90%”라며 연말로 갈수록 엘니뇨 강도가 세질 것으로 예측한다. NOAA에 따르면 적도 태평양의 엘니뇨 감시 구역인 ‘니뇨 3.4’의 해수면 온도는 11∼17일 기준 이미 평년보다 0.9도 높은 28.6도로 나타났다.
이 같은 엘니뇨는 폭우와 폭염, 가뭄과 같은 이상기후를 불러오며 주요 농산물, 곡물 생산에 타격을 줄 수 있다. 특히 호주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칠레와 브라질 등 남미의 주요 식량 원자재 생산국들이 엘니뇨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공급 차질로 인한 물가 상승은 불가피할 것으로 풀이된다.
이미 시장에서는 가격 상승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시카고상품거래소에서 7월물 옥수수 가격은 26일 1부셸(약 27kg)당 6.45달러로 1일(5.93달러) 대비 약 8.8% 올랐다. 21일에는 6.71달러까지 치솟은 바 있다. 또 대두 선물(7월물)은 같은 기간 14.2% 뛰었고, 밀 선물(7월물)은 17.4% 치솟았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지난달 국제 설탕 가격 지수는 올해 들어 34.9% 오른 157.6으로 집계됐다.
식량 원자재 가격이 뛰고, 이를 원료로 하는 식료품 가격이 오르면 겨우 진정되기 시작한 국내 소비자물가도 ‘밥상 물가’를 중심으로 다시 요동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올해 1∼5월 전년 동기 대비 4.2% 올라 지난해 하반기(7∼12월·5.6%)에 비해 상승 폭을 줄였고, 5월에는 3.3%로 빠르게 둔화됐다. 하지만 국제 유가 상승과 공공요금 인상 등에 엘니뇨발 식료품 가격 부담까지 더해지면서 물가가 꿈틀거릴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올해 1월 주요 선진국들보다 먼저 금리를 동결시킨 한국은행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금융권의 대출연체율이 치솟고 경기 불안이 이어지고 있어 물가가 뛴다고 금리 인상 카드를 꺼내 들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신한투자증권 하건형 수석 연구원은 “에너지 및 일부 식료품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미국 등과 달리 한국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식료품과 에너지 물가가 원자재 가격에 민감하게 움직인다”며 “하반기 물가 불안 재점화에 대한 경계심이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상기후 리스크가 과거에 비해 갈수록 커지고 있다”며 “이것만으로 한은이 금리를 인상하기는 어렵겠지만, 따져야 할 ‘득과 실’이 더 많아진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국제금융센터는 최근 발표한 ‘엘니뇨에 따른 기후·경제 리스크 점검’ 보고서에서 “1960∼2019년 엘니뇨 발생으로 인한 세계경제 손실은 평균 3조4000억 달러였다”며 “회색코뿔소(예상할 수 있지만 간과하기 쉬운 위험)인 엘니뇨가 내년까지 세계 경제 회복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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