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기업가정신 진주 국제포럼]
K-기업가정신 精髓 LG 구인회 창업주의 삶과 경영이념
현실에 발 딛되, 남이 하지 않는 일 찾아 개척하다
“국민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것부터 착수하라. 일단 착수하면 과감히 밀고 나가라.”
연암 구인회 LG 창업주의 삶은 한국 산업 발전사(史) 자체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성장 산업을 개척했다. 일본인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을 헐값에 불하받는 대신 부가가치를 창출할 산업에 도전했다. K-기업가정신의 정수라고 할 만하다.
그는 1907년 8월 27일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익히던 연암은 3년간 지수보통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이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지만 2학년을 중퇴하고 귀향했다.
귀향 후 연암은 협동조합에 주목했다. 석유, 비누, 광목, 비단 등 일용 잡화를 공동구매하면 가격도 싸고 조합원에게도 이익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이 1929년 지수협동조합 설립으로 이어졌다. 사업 전환을 모색하던 연암은 1931년 7월 진주에 ‘구인회상점’을 열었다. 포목을 비수기에 사들였다가 성수기에 팔아 이윤을 남겼다.
연암이 근대적 기업가로 거듭난 시기는 광복 이후다. 1945년 9월 부산으로 이주한 그는 서대신동에 있는 적산가옥을 사들여 자리를 잡고 11월에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다. 이듬해 2월 화장품 판매 사업을 시작해 돈을 벌었다. 그러자 연암은 크림을 직접 생산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947년 1월 LG그룹의 모태가 된 ‘락희화학공업사’가 탄생했다.
럭키표 크림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크림통 뚜껑이 파손돼 반환되는 양도 동시에 늘었다. 이즈음 연암이 찾은 해결책이 플라스틱 뚜껑이다. 그는 범일동에 플라스틱 공장을 설립하는 한편, 미국에 사출기를 주문하면서 본격적으로 플라스틱 제품 생산에 눈을 떴다. 1952년 9월에는 플라스틱 빗을 생산했다. 11월에는 공장을 부전동으로 옮겨 칫솔, 세숫대야, 식기 등을 만들었다. 1954년 6월에는 연지동에 공장을 세워 비닐 원단 및 플라스틱 제품 제조시설을 대폭 확장했다. 1955년 3월에는 럭키표 치약도 생산했다.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가 얼개를 드러낸 시기는 1958년이다. 금성사의 역사는 전자제품 국산화 역사와 포개진다. 금성사는 설립 이듬해부터 라디오를 만들었지만 외제 선호 경향에 밀려 시장에서 고전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밀수품 단속이 강화되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특히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전개되면서 라디오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1966년 8월에는 국내 최초로 흑백TV(19인치)를 생산한 업체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연암은 1966년 국내 민간업체 최초로 외자를 도입한 합작사 호남정유를 설립해 에너지산업의 기틀을 다졌다. LG 창업주로서 역량을 발휘하던 그는 1969년 향년 62세로 별세했다.
● 인화단결, 개척정신, 연구개발
연암의 경영이념은 ‘인화단결’ ‘개척정신’ ‘연구개발’로 요약된다. 인화단결은 창업 당시 작은 회사 규모와 무관치 않다. 가까운 사람들과 회사를 운영해야 했기에 서로 신뢰하고 책임을 다하자는 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합의한 원칙을 준수하자는 엄정한 책임 의식이 전제돼 있다.
개척정신은 1947년 부산의 작은 화장품 공장을 오늘날 LG로 성장시킨 지렛대다. 모험심이 강한 연암의 면모는 현실을 철저히 파악하는 데서 출발했다. 초창기 LG의 성장은 현실에 발을 딛되 남이 하지 않는 일을 찾아 개척해 온 노력의 결실이다.
개척정신이 방향을 정하는 거시적 철학이라면, 연구개발은 개척정신을 성공으로 이끈 미시적 이념이다. LG는 1950년대 열악한 환경에서도 공장을 세우기 전 연구실부터 설립하고 관련 설비를 들여왔다. 화학과 전자를 아우르며 여러 건의 ‘국내 최초 개발’에 성공한 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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