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 증권계 장악하던 애널리스트, 어떻게 변했나
수억 연봉 자랑하던 선망의 직업
‘스타 애널리스트’도 많이 탄생
최근엔 수익성 줄어 리서치센터 폐업
《#일명 ‘1세대’라 불리는 32년 차 증권사 애널리스트 A 씨. 한국 증권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1990년대 초 입사한 그는 한때 수억 원의 연봉을 받으며 ‘증권가의 꽃’이라고 불렸던 애널리스트의 최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제 애널리스트의 위상이 추락하면서 매달 급여 통장에 찍히는 금액도, 증권사 내 영향력이나 업무량도 적어진 현실. “애널리스트 전성기 때는 돈을 많이 받는 만큼 일도 너무 많아 힘들었다”라며 “그 시절이 꼭 그립지만은 않다”라고 말했지만 그의 덤덤한 목소리에 섭섭함이 적잖이 묻어났다. 》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수억 원대 연봉을 자랑하며 대학생들의 선망을 받는 직업으로 꼽혔던 증권사 리서치센터 애널리스트. 그러나 과거의 명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날이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증권사 수익구조 변화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등장, 투자상품의 다변화 등의 영향이 겹치며 애널리스트의 위상이 내리막을 탄 것이다.
● ‘증권가의 꽃’으로 불렸던 애널리스트들
본보가 인터뷰한 1세대 애널리스트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를 애널리스트의 ‘황금기’로 꼽는다.
1997년 외환위기라는 시련을 거치며 기업 펀더멘털(기초체력) 파악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던 시기이기 때문. 이때 이른바 ‘해외파 애널리스트’들이 고액의 연봉을 받고 영입됐고, 2007년 코스피가 처음 2,000을 넘어서자 기관투자가의 리서치 수요까지 늘어났다. 1999년부터 애널리스트로 일해온 B 씨는 “양질의 리포트가 쏟아져 나왔다”며 “애널리스트들에게는 가장 좋았던 시기”라고 털어놓았다.
이때 정확한 경제 방향성 예측으로 ‘이코노미스트’로서 명성을 쌓은 애널리스트들도 적지 않았다. ‘닥터 둠’으로 불리는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도 그중 하나. 대신증권 리서치센터장, 대신경제연구소 대표를 역임한 그는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예측해내며 거시경제 ‘족집게’로 이름을 떨쳤다.
각종 통계와 현장을 담은 애널리스트들의 리포트가 여의도 밖에서까지 화제를 모으는 일도 왕왕 있었다. 2011년 당시 유진투자증권의 김미연 애널리스트가 내놓은 입시전형 분석 자료 ‘교육의 정석’은 뜨거운 반응을 모으며 서울 강남구 대치동 엄마들은 물론이고 입시정보에 목말랐던 워킹맘들의 ‘필독서’로 떠올랐다. 인터넷 카페에선 이 자료를 앞다퉈 공유했고 일부 입시컨설팅 업체들은 100쪽이 넘는 이 자료를 따로 묶어 돈을 받고 팔기까지 했다. 유진투자증권은 전국 단위 설명회를 열었고, 김 애널리스트도 단숨에 ‘스타 애널리스트’로 떠오르며 대신자산운용 리서치운용본부장으로 영입되기도 했다.
● 신뢰 잃고 위상 추락… ‘엑소더스’ 가속화
‘스타급’ 대우를 받던 애널리스트의 인기는 2010년대 후반 들어 시들해졌다. 이후 해가 지날수록 애널리스트의 ‘엑소더스(대탈출)’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4일 기준 국내 현역 애널리스트 수는 1069명이다. 약 10년 전인 2014년(1192명)에 비해 123명이나 줄었다. 증시 활황기였던 2010년 1575명에 달했던 것에 비하면 13년 만에 약 32% 급감한 것이다. 지난해에도 케이프투자증권이 ‘비용 절감’ 차원에서 아예 리서치센터를 없애버리기도 했다.
A 씨는 “애널리스트의 연봉 절대 금액도 2010년보다 낮아졌다”고 고백했다. 젊은 세대의 애널리스트는 리서치센터를 ‘거쳐 가는 곳’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다. 1세대 애널리스트 정용택 IBK투자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요즘에는 애널리스트로 입사해 어느 정도 경력을 쌓으면 투자은행(IB)이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쪽으로 이동한다”고 설명했다.
애널리스트의 위상이 위태로워진 데는 △수익률 저하 △신뢰 상실 △투자 환경의 변화 등 복합적인 요인이 얽혀 있지만, 결정적으로 리서치센터 운영의 수익성이 낮아진 게 치명타라는 평가가 나온다. 리서치센터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기관 및 법인 고객들에게 투자에 도움이 될 종목 분석 자료를 제공해 매매거래를 유치하는 영업 활동이었다. 그러나 과거 증권사에 주식매매를 위탁했던 법인 투자자들은 수수료율이 더 낮은 온라인으로 직접 주문하는 비중이 늘어났다. 증권가의 경쟁 격화도 수익성 저하에 영향을 미쳤다. 정 이코노미스트는 “증권사가 많아지면서 수수료를 두고 출혈 경쟁이 생긴 측면도 있다”며 “법인영업의 수수료 수익이 계속 하락하니까 리서치센터의 비용을 충당하는 게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또 애널리스트의 리포트가 아니더라도 유튜브 등 투자 정보를 얻을 경로가 다양해지면서 애널리스트 분석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졌다는 해석도 나온다.
애널리스트 리포트의 정확도가 떨어지면서 사실상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는 지적도 있다. 25년 차 애널리스트 C 씨는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1년간의 시장 동향도 맞히지 못하는 리포트를 돈 주고 살 필요가 없지 않나”며 “당연히 리서치센터의 파워가 현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B 씨는 “애널리스트들이 자기가 담당하는 기업의 실적을 제대로 추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 리포트 질 하락엔 접근 어려운 기업정보가 한몫
일부에서는 리포트의 정확도가 떨어진 원인으로 기업정보에 접근하기 어려워진 현실을 꼽기도 한다. 2000년대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기업과의 유착관계가 논란이 될 정도로 기업들로부터 비공식 루트로 정보를 받곤 했다. B 씨는 “과거에는 기업들이 실적 공식 발표 전 애널리스트에게 근사치를 슬쩍 알려주면 그 수치를 토대로 리포트를 작성하기도 했다”며 “이를 ‘위스퍼 넘버(비공식 소문)’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러한 관행을 악용해 선행매매(기업의 중요 정보를 미리 빼돌려 자신의 투자에 활용하는 불공정거래)를 저지르는 사건들이 잇따르면서 기업들이 미리 정보를 흘리는 게 차단돼 버렸다”고 설명했다.
기업정보를 얻기 어려우니 매도 의견을 내기도 쉽지 않다. 올해 1분기(1∼3월) 국내 주요 증권사들의 평균 매수 의견 비중은 약 89%로 나타났다. DS투자증권, 부국증권, 유화증권 등의 매수의견 비중은 100%에 달했다. 외국계 증권사를 제외하고 매도 의견을 낸 곳은 DB금융투자(0.7%), 미래에셋증권(0.7%), 유진투자증권(1.3%), 한화투자증권(0.6%) 등이 유일했다. ‘매도 의견’을 내버리면 불이익을 받을 위험이 따르기도 한다. 정 이코노미스트는 “예전에 일 잘하는 증권사 애널리스트가 한 대기업을 상대로 매도 리포트를 낸 적이 있었는데, 그 기업이 거래 정지를 당하면서 해당 증권사 펀드에 투자했던 수천억 원을 바로 빼버렸다”며 “매도 리포트를 못 내는 것을 애널리스트 탓으로만 돌려선 안 된다”고 말했다.
● “애널리스트 역할 더 중요” vs “이미 사양 산업”
고객의 수요도, 회사의 지원도 메말라가는 한국 리서치센터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인 만큼 애널리스트의 전문성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제 과거와 같은 ‘전성기’는 다시 없을 것이란 비관론도 적지 않다.
막 애널리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신입 애널리스트들은 애널리스트의 역할이 되레 더 중요해졌다고 자신한다. 지난해 8월 입사한 E 씨는 “빠르게 움직이는 시장을 분석하고 공부하는 게 좋아서 애널리스트를 택했다”며 “유튜브와 주식 오픈채팅방 등 투자자가 정보를 얻을 채널이 다양해진 건 애널리스트 입장에서는 굉장한 부담이지만, 정보를 재검증해 신뢰성을 높이는 일은 더 중요해졌다고”고 했다.
반대로 한 증권사 관계자는 “애널리스트는 이미 사양 산업이 돼버렸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이들의 분석이 더 이상 맞지도 않고, 돈만 축내는 곳을 민간 기업인 증권사가 더는 끌고 갈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석훈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증권사가 리서치센터를 전폭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이상 애널리스트의 입지가 과거처럼 되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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