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규제에 무너지는 중기 생태계]〈3〉 ‘갈라파고스 규제’에 우는 유니콘
美-中, 얼굴인식 도어록 등 생산
한국은 기술 있어도 상품화 못해
올해 美 유니콘 655개, 韓은 14개
국내 정보기술(IT) 플랫폼 기업 A사는 도어록 관련 사업에 공격적으로 투자해 기술을 확보했지만 상품화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에서 도어록은 ‘전기용품 및 생활용품 안전관리법’상 기존 알칼리 건전지를 탑재한 제품만 안전 인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 구글, 중국 샤오미 등 해외 경쟁사는 이차전지를 탑재한 도어록에 얼굴·홍채 인식, 체온 측정, 영상통화 등 다양한 신기능을 적용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A사 관계자는 “일반 건전지는 용량이 작아 얼굴 인식 같은 첨단 기능을 감당할 수 없다”며 “이미 전기차와 스마트폰에 널리 쓰이는 이차전지를 도어록에만 넣지 못하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식음료 배달과 ‘홈술 문화’(집에서 술을 즐기는 문화)가 보편화됐지만 국내 배달 플랫폼 B사의 주류 판매는 좀처럼 늘지 않고 있다. 한국에만 있는 ‘배달 시 주류 가격이 음식 가격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제 때문이다. 선호 주종이 다양화되고 있는데도 비교적 고가인 와인이나 위스키, 전통주 등에 대해선 배달 시장이 열리기 어렵다. 주류 배달 때 소비자의 연령, 배달 시간(오후 11시 이후 금지 등) 정도만 제한을 두고 있는 해외 주요국과 크게 다르다.
기업가치 1조 원 이상인 유니콘을 꿈꾸는 스타트업들이 오직 한국에만 있는 ‘갈라파고스 규제’로 인해 성장이 가로막히고 있다. 올해 기준 미국의 유니콘 기업 수는 655개, 중국은 169개다. 한국은 14개에 그쳤다. 본보는 한국 스타트업 대표 단체인 코리아스타트업포럼(코스포)을 통해 스타트업 업계에서 가장 시급한 개선을 요구하는 킬러 규제 피해 사례 12건을 선정했다. 대부분 시장 수요가 뚜렷해 해외 주요국에서는 이미 성공한 비즈니스 모델인데, 한국에선 낡은 규제와 이를 방패로 삼은 기득권 세력의 압박으로 사장될 위기에 처했다.
헌옷 리셀 스타트업, 美선 나스닥 상장… 韓은 ‘폐기물 규제’ 발목
글로벌 100대 유니콘중 韓기업 1곳… 韓 기업경쟁력 10년새 39위→53위로 승차공유-원격의료-로보택시 등 주요국 성공모델도 韓선 사장 위기 “규제 신속 개선해 숨통 틔워줘야”
● 해외서 급성장 헌 옷 리셀, 한국선 ‘폐기물 규제’ 적용
2021년 창업한 스타트업 리클도 A사와 비슷한 처지에 몰리게 됐다. 이 회사는 모바일 플랫폼을 활용해 수거한 헌 옷을 수선, 가공한 뒤 온·오프라인 리셀(재판매) 매장에서 판매하는 모델로 주목받았다. 친환경성과 편리성을 함께 갖춰 20, 30대 여성을 중심으로 인기몰이를 했다. 서비스는 단기간에 서울, 부산, 대전, 대구 등 대도시 전역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리클은 최근 사업이 제한될 위기에 놓였다. 환경부로부터 헌 옷은 ‘폐기물 규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쓰레기나 고철 처리 업체처럼 사업 규모에 따라 일정 수준 이상의 환경오염 방지 시설 등을 갖춰야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업계에서는 “헌 옷만 수선하면 되는데 폐기물 관리 시설을 갖춰야 한다는 게 황당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사창우 코스포 팀장은 “세계적인 기후 위기로 국내에서도 탄소중립을 정책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면서 “대표적인 리셀 사업 모델을 기존 분류 항목에 없다는 이유로 폐기물과 같이 규제한다면 한국에서 친환경 비즈니스 창업이 이뤄지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헌 옷 리셀 스타트업인 스레드업은 2021년 3월 나스닥시장에 상장했고, 빠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 회사 매출액은 2020년 1억8600만 달러(약 2444억 원)에서 작년 2억8800만 달러로 2년 만에 55% 성장했다. 현재 시가총액은 약 4억 달러다.
최근 두 달 새 6개 업체가 줄줄이 폐업한 원격의료 업계도 예비 유니콘의 고사 사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원격의료를 규제하는 곳은 한국뿐이다. 한국은 감염병예방법에 따라 국가적 감염병 위기 발생 시에만 의료인-환자 간 한시적 비대면 진료를 허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기간 굿닥, 닥터나우 등 원격의료 스타트업들이 시장에 활발히 진출했다.
한시적 허용 기간 원격의료 시행 건수는 3700만 건, 이용자는 1400만 명을 넘어섰다. 원스톱 모바일 진단, 약 배달 서비스 등이 일상 의료 서비스로 안착했다. 하지만 엔데믹 상황에 접어들면서 이 사업은 다시 중단 위기에 처했다. 기존 의료 업계의 반발도 거세 관련 부처 논의는 지지부진한 상태다. 5월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 6단체는 공동 성명을 통해 비대면 진료를 제도화하거나 최소한 시범사업을 통해 활로를 열어 달라고 주장했다.
반면 미국은 1996년 ‘원격통신개혁법’ 등을 통해 원격의료 서비스를 법제화했고, 코로나19를 계기로 기존에 남아 있던 원격의료 장소 제한도 전격 폐지했다. 중국은 정부 주도의 ‘인터넷 의료’를 적극 지원하며 2020년부터는 의료보험 혜택도 제공하고 있다. 코로나19를 맞아 2020년 원격의료를 한시 허용했던 일본도 2021년 이를 영구 허용으로 바꿨다.
● 한국 규제 환경 2013년 39위→2023년 53위
‘한국 한정’ 갈라파고스 규제는 새로운 스타 기업 탄생을 막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경련에 따르면 5월 말 기준 글로벌 100대 유니콘 기업 중 한국 스타트업은 단 1곳(비바리퍼블리카)만 이름을 올렸다. 최근 5년간 전 세계 유니콘 기업은 449곳에서 1209곳으로 세 배 가까이로 늘었는데, 한국 기업은 10곳에서 14곳으로 늘어나는 데 그쳤다.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2%에서 1.2%로 쪼그라들었다.
글로벌 100대 유니콘 중에는 해당 비즈니스 모델이 한국에선 아예 불가능(8개)하거나 제한적으로만 가능(9개)한 경우도 17개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됐다. 분야별로는 공유 숙박, 승차 공유, 원격의료, 드론, 로보택시, 핀테크, 게임 등 다양하다.
규제로 인한 혁신 동력도 계속 떨어지고 있다. 올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에서 발표한 국가경쟁력 평가 중 규제 환경을 나타내는 기업 여건 부문에서 한국의 순위는 64개국 중 53위를 기록했다. 2013년 39위에서 최근 10년간 14계단이나 뒷걸음질쳤다.
경제계에서는 킬러 규제 개혁을 위해 △공무원식 규제 접근법 개선 △규제 시스템 자체의 네거티브 전환 △기존 기득권 업계 스스로의 변화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정주 전경련 기업제도팀장은 “규제개혁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이 25년 전인데 아직도 한국 산업계는 규제 개혁을 외치고 있다”며 “특히 미래 세대를 담보할 예비 유니콘 업계의 숨통을 열어주기 위해서는 이들이 당장 직면한 킬러 규제부터 신속히 개선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혁신 모델이 시장에 진출하면 기존 사업자들도 동반 상승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이혁우 배재대 행정학과 교수는 “4년 전 인터넷전문은행 출범을 위한 규제 개선 작업에서 엄청난 진통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지금은 기존 은행들도 모바일 친화적으로 바뀌면서 소비자 편의성이 올라갔다”며 “1, 2%의 잠재적인 위험성만 가지고 신산업 자체를 막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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