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경제 갈등이 격화되는 데다 중국 경제 지표까지 기대치를 밑돌면서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기업들의 중국 사업 재편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중국 시장의 잠재력을 믿고 정책적 불확실성까지 감수해 왔던 기업들 중 최근 현지 법인을 매각하거나 청산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탈중국 엑소더스’는 향후 더 심화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 “중국 철수 이제 시작일 수도”
17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현대제철은 최근 공시한 반기보고서를 통해 현대스틸 베이징 프로세스와 충칭 자산 매각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2003년 설립한 베이징 법인은 2017년 적자로 돌아섰다. 충칭공장은 설립 이듬해인 2016년부터 줄곧 적자에 시달렸다. 2017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이후 현대자동차 베이징공장과 충칭공장의 가동률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동반 진출한 현대제철에도 타격을 입혔다. 현대제철 내부에선 이미 지난해부터 “중국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롯데케미칼도 중국 화학기업과의 합작 공장인 롯데삼강케미칼 지분을 전량 매각했다. 롯데케미칼 측은 “사업성이 떨어지는 비핵심 자산을 매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중국 내 화학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생산을 늘리면서 중국 법인을 털어내는 게 전체 사업 포트폴리오상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국내 한 식품 대기업 관계자는 “최근 내부 회의에서 올해까지 중국 시장에서 턴 어라운드를 못 하면 특단의 조치를 내리겠다는 말까지 나왔다”며 “한국 기업들의 중국 탈출 러시는 이제 시작일 수 있다”고 말했다.
탈중국 러시는 비단 대기업의 얘기만은 아니다. 중견 자동차업체 쎄보모빌리티는 초소형 전기차 생산기지를 한국으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자동차 부품업체 삼기도 중국 법인을 현지 업체에 매각했다. 대중국 무역을 하고 있는 한 제조업체 대표는 “중국의 성장이 한풀 꺾이는 것은 물론이고 활력이 없다는 느낌”이라고 전했다.
● 해외 기업들도 중국 탈출
글로벌 기업들도 중국 시장을 떠나고 있다. 일본 미쓰비시는 중국에서의 자동차 생산을 중단한 데 이어 최근 전면 철수를 결정했다. 일본 마쓰다도 20년간 이어온 중국 합작사 일기마쓰다를 청산하기로 했다. 영국 반도체 업체 ARM은 미국 뉴욕 증시 상장을 준비하면서 중국 사업부 철수를 진행했다. 지난해 6월 모회사인 소프트뱅크에 ARM차이나 지분 약 47%를 넘겼는데, 중국 정부가 1년 이상 승인을 보류하고 있다.
미국 항공기 제조업체 보잉도 중국 시장에서 점차 발을 빼는 모습이다. 항공업계에 따르면 보잉은 여객기 부문에서 중국을 1순위로 놓고 공들여 왔다. 하지만 미중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현재 우선 순위는 중국이 아닌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으로 옮겨갔다.
중국 주재 미국상공회의소(암참 차이나)가 올해 3월 319개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중국이 세계 3대 시장에 속한다는 답변은 45%였다. 2년 전 같은 조사에서의 60%보다 15%포인트나 빠졌다.
구민교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2000대 초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국제무대로 이끌어준 것이 미국”이라며 “미국과의 갈등으로 중국은 외부 발전 동력이 사라지고 있고, 내부적으론 부동산 거품 문제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구 교수는 이어 “한국은 아직까지 중국 의존도가 큰 게 사실이지만 기업들 중에는 ‘꼭 중국이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에 대체 시장을 찾는 사례가 빠르게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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