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더쿠’는 한 가지 분야에 몰입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가장 깊게 빠진 영역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종일 영화와 드라마를 봐도 질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직업입니다. 영화와 미드를 보면서 돈을 버는 직업이니까요. 또, 번역은 퍼즐을 맞춰 나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원문의 의미를 파악한 후 적합한 한글 표현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짜릿합니다."
함혜숙 영상번역가(이하 번역가 혹은 작가)는 어린 시절 뜻하지 않게 ‘덕통사고’를 당했다. 홍콩 영화에 거하게 치인 덕에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고, 이어 중국 영화와 드라마를 번역하는 번역가가 됐다.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는 걸 넘어 ‘영상번역’이라는 일 자체에 20년 넘게 매료돼 있다는 그에게서 덕업일치 연대기와 영상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주윤발이 좋아 중국어를 배웠어요
중학교 시절 우연히 보게 된 홍콩 영화가 인생을 결정지을 줄 당시의 그는 과연 알았을까? 함혜숙 번역가는 중학생 때 <첩혈쌍웅>을 보고 주윤발의 매력에 빠졌다. 주윤발이 출연하는 <영웅본색>을 이어 보곤 비디오 대여점에서 홍콩 영화들을 섭렵했다. 1990년대 말 ‘홍콩 4대 천왕’으로 일컬어지던 유덕화, 곽부성, 장학우, 여명이 나오는 영화는 거의 다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속 보다 보니 중국어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최애 배우들이 쓰는 언어가 왠지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 과목으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해 대학 전공도 망설임 없이 중문학과로 택했다. 홍콩 영화에 나오는 광둥어와 중국 표준어가 다르다는 건 나중에야 안 사실. 번역가를 꿈꾸게 된 함 작가는 영화나 드라마 대본을 구해 읽거나 손수 번역을 해보기도 했다. 처음엔 책을 번역하는 출판 번역의 길만 있는 줄 알았다.
“2000년도 무렵 TV에서 중국 드라마인 <황제의 딸>과 <안개비연가>를 보고 영상번역에 관심이 생겼어요. 미드 열풍이 불면서 해외 드라마를 더빙이 아닌 한글 자막으로 보는 게 선호되기 시작하던 때였거든요.”
한국어 자막을 읽으면 읽을수록 자막을 만드는 일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영상번역 회사에 입사했다. 함 작가는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비디오 테이프로 영상을 보며 번역을 했다”며 “번역가들이 비디오 테이프와 종이 대본을 받기 위해 번역 회사를 방문하거나 택배로 주고받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입사한지 얼마 안 돼 그는 중국 무협 시리즈를 번역하게 된다. TV에 방송하는 작품이 아닌 비디오 출시용 번역이었지만, 첫 작품에 품었던 각별한 애정과 뿌듯함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출시된 40편 정도의 비디오 세트를 모조리 구매했다고. 판매하는 비디오 대여점 사장님이 의아해하며 몇 번이고 재차 물었다. “정말 구매하는 거 맞죠? 진짜로요?”
매일매일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일
하지만 국내에 미드 열풍이 불면서 중드에 대한 인기가 사그라 들었다. 그를 영상번역의 길로 인도했던 바람이 되려 역풍으로 다가온 것. 이제 막 사회 생활을 시작했건만, 밥줄이 끊길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는 영어 공부에 매달려 미드 번역도 병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검색하랴 번역하랴 남들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밤을 새우기도 일쑤였다. ‘영어를 잘 못한다’는 콤플렉스가 늘 스스로를 괴롭혔다. 하지만 공부 외엔 달리 방법도 없었다. 원서를 번역해 번역본과 비교해 보거나 필사를 하고, 평소 보지 않던 장르를 보며 단어와 표현을 수집하기도 했다. 그의 블로그에는 10년 넘게 공부해온 기록들이 빽빽이 쌓여있다.
“번역가로 살다 보면 매일매일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매번 새로운 내용을 번역해야 하니까 끊임없이 공부할 수밖에 없어요. 지금도 매일 오전에 1~3시간씩 공부와 독서를 합니다.“
번역에 외국어 실력만큼 중요한 게 있다. 바로 한글 문장력과 배경지식이다. 외국 거주 혹은 유학 경험이 있는 사람이 번역에 유리하지만 ‘잘’하긴 어렵다. 원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한글 문장으로 풀어내는 건 다른 문제기 때문. 문맥과 뉘앙스를 파악해 자연스럽고 적절한 문장으로 적어내는 게 번역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배경지식이 있다면 당연히 더 빠르게, 잘 풀어낼 수 있다. 다방면으로 쌓인 인풋(input)이 모여 적합한 한글 표현을 찾아내는 과정은 짜릿하기 그지없다.
영상번역 단가는 신입 기준 분당 2,500~3,500원 정도다. 초보 번역가는 일주일에 드라마 한 편 번역하기도 쉽지 않다. 전문적이고 어려운 작업이나 베테랑 번역가는 더 높은 번역료를 받지만, 일반적으로 더 빠르게 많이 작업하는 번역가가 높은 수익을 낼 수밖에 없다.
번아웃이 왔을 땐 잠시 거리두기
어떤 영화는 아름다운 내용으로 번역하는 내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다. 그 마음이 관객에게까지 가닿아 SNS에 “자막이 좋아서 영화도 잘 봤다”는 감사 인사로 이어진 경우도 있다. 좋은 영화는 오래도록 사랑받는다는 것을 함 작가는 몸소 느껴왔다. 영화와 드라마가 좋아 시작했지만 다른 사람도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게끔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며 일의 의미와 가치는 더욱 커졌다.
그렇다고 마냥 즐거운 건 아니다. 선호하는 장르만 번역할 수는 없을뿐더러, 시간이 촉박하게 주어지는 편이라 쫓기며 일한다. 공부량도 많다. 의학물을 번역할 땐 의사에 빙의해 의학 용어나 인체를 공부하고 법정물을 번역할 땐 잠시 변호사가 돼 법률 용어를 탐독하는 식이다. 차별적인 뜻을 내포하는 표현, 비속어 등도 조심한다. 5초 간 보이고 사라지는 자막 한 줄 한 줄마다 번역가들의 고민과 고뇌가 담겨있는 것이다.
사실 함 작가는 영상번역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그만두려 했다. 엄청난 업무 강도와 번역 일을 평가절하하는 업계 문화에 지쳐버린 것. 재직 중이던 번역 회사를 관두고, 한동안 국내 영화만 봤다. 새로운 길을 찾고자 통번역 대학원 입시를 준비해 보기도 했지만 결국 책상 앞에 앉아 고민하며 문장을 고쳐 나가는 번역이 가장 적성에 맞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꼈다.
“한동안 번역과 거리를 두고 지내니 오히려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어요. 그때 꾸역꾸역 계속했다면 번아웃이 와서 완전히 손을 떼지 않았을까 지금도 생각해요. 슬럼프에 빠진 초보 번역가들에게 ‘잠시 번역과 거리를 둬 보라’는 조언도 종종 건네곤 합니다. 번역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다시 돌아와서 번역을 하게 된다는 걸 아니까요.”
좋아하는 일 지속하는 법: 동료 만들기
함 작가는 업계에 입문한 지 10년 차쯤 됐을 때 책 <영상번역가로 산다는 것>을 출간했다. 그리고 이 책을 계기로 2011년 오프라인 강의를 시작하며 번역 인생에서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원래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던 성격은 많은 수강생을 만나며 점점 외향적으로 변했다. 또한 홀로 프리랜서로 일할 때보다 넓은 시야로 업계를 보게 됐다. ‘수강생들에게 기껏 영상번역가 되는 법을 가르쳤는데 데뷔할 방법도 없고 전망도 암울하다면 무슨 의미가 있나’는 생각이 든 그는 고민 끝에 직접 번역 에이전시를 차리기에 이른다. 그렇게 2012년 ‘더라인 미디어’를 설립하고 2013년부턴 ‘더라인 아카데미’를 열었다. 직접 번역가를 양성하고 우수한 수강생에겐 일감을 제공한다. 미드 덕후라며 함 작가의 첫 강의를 수강했던 제자 중 실력 있는 번역가로 거듭나 서로에게 든든한 동료이자 선후배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이도 있다.
“수강생들에게 실제로 데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면서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주도적으로 일하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체 숲을 볼 수 있고, 동료 번역가들과 함께 좋아하는 일을 지속할 수 있어 좋습니다. 수강생들이 번역가로 데뷔하고 경력을 쌓으며 자리 잡아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뿌듯해요.”
근래 집중하고 있는 일은 출판이다. 함 작가는 2015년, 출판사 ‘더라인 북스’까지 차려 재능 있는 번역가를 발굴해 책을 내기 시작했다. 번역과 강의는 이미 체득한 경험과 지식을 꺼내어 소비하는 일이라면, 출판은 없던 것을 만드는 창의적인 일이라 또 다른 보람과 발전하는 재미가 있다. 더불어, 번역가이자 작가들에게 새로운 수익의 기회도 만들어 줄 수 있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오래 지속하는 법을 고민하다 번역 회사와 출판사까지 차리게 됐어요. 번역, 강의, 번역 회사, 출판을 한다고 하면 많은 일을 동시에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전부 ‘번역’과 연관 있는 일이고 제가 번역가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을 일들입니다.”
덕질은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영상번역 업계에 몸을 담은지 벌써 20년. 번역 환경도 많이 달라졌다. 앞서 말했듯 과거에는 비디오 테이프가 오갔지만, 지금은 메일로 자료가 오가기 때문에 인터넷만 된다면 전 세계 어디서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또한 넷플릭스를 시작으로 다양한 OTT 플랫폼이 늘어나면서 영상번역 수요 역시 이전에 비해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가 몰아치는 업무와 일상을 끝내고 찾는 것도 여전히 영화와 드라마다. 영상번역가들은 보통 영화와 드라마 덕후들이기 때문에 쉴 때도 영상을 본다. 함 작가 역시 바쁜 일상 중에도 부지런히 최신 작들을 섭렵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샬럿 왕비: 브리저튼 외전>를 얘기하며 “실제 인물인 조지 3세와 샬럿 왕비의 이야기에 상상력을 가미한 드라마다”, “이미 본 사람들이 입을 모아 호평하고 있다” 등의 추천 멘트를 쏟아내는 모습은 영락없는 ‘덕후’였다.
대표작을 묻자 “모두가 알 만한 유명한 작품은 많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베를린, 아이 러브 유(2019)>, <워 위드 그랜파(2021)>와 <라이프 잇셀프(2022)>가 좋았다”며 번역하고 자막을 적어내는 동안 가슴 뭉클하게 만들었다던 영화를 읊는 함혜숙 번역가. 그 대답에서 20년 넘게 일해도 여전히 바래지 않은 영화와 번역에 대한 생동하는 애정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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