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경제의 침몰이 글로벌 경제의 큰 이슈입니다. 다시 한번 ‘유럽의 병자(Sick man of Europe)’가 됐다는 평가까지 나오죠. 그 배경엔 여러 요인이 있지만(에너지·인구구조·IT취약 등), 상당 부분은 이 산업의 부진에 기인합니다. 독일 산업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자동차 산업이죠.
독일 언론이 “전자제품과 사진 산업에 이어 독일의 또 다른 전통 산업(자동차)이 사라질 위기”라며 (다소 과장해서) 걱정할 정도인데요. 왜 지금 독일 자동차 산업이 위기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간단합니다. 전기차 전환이 너무 늦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세계 최고의 자동차 생산 기술을 가진 독일은 어쩌다가 전기차에선 뒤처지게 된 걸까요. 판단 착오일까요, 능력 부족일까요, 아니면 둘 다일까요. 독일 자동차 산업의 위기론을 딥다이브 해보겠습니다.
*이 기사는 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폭스바겐, 메르세데스 벤츠, BMW 같은 독일 자동차 기업들은 그동안 중국 덕을 톡톡히 봤습니다. 폭스바겐의 지난해 전체 판매량 중 40%를 중국이 차지할 정도니까요(벤츠는 36.8%, BMW는 33%). 10년 전(폭스바겐 31%, 벤츠 18%, BMW 14%)과 비교하면 중국 의존도가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메르세데스 벤츠 그룹의 올라 칼레니우스 회장은 중국이 없는 독일 경제는 “완전한 환상”이라고 말한 바 있죠.
문제는 그 중국 시장에서 독일차 지위가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는 겁니다. 2019년 23.6%였던 독일차의 중국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19.1%로 줄어들었죠. BYD(비야디) 같은 중국 자동차 기업들이 전기차를 앞세워서 빠르게 치고 올라왔기 때문인데요. 중국에서 많이 팔린 전기차 모델 톱 10에 독일차는 아예 없습니다(외국 브랜드는 테슬라뿐). 중국 전기차 시장에서 독일차는 고작 5%를 차지하는 후발주자입니다.
이 대목에서 뼈아픈 부분은 중국에 자동차 제조 기술을 전수해준 게 바로 독일 기업이란 점입니다. 그동안 외국 자동차 기업이 중국 시장에 진출하려면 반드시 중국 기업과 합작회사를 설립해야 했죠(합작투자 의무는 지난해 1월에야 폐지됨). 중국 정부는 기술 이전과 부품의 현지 조달도 요구했습니다.
폭스바겐(1984년 합작사 설립)을 필두로 독일차 기업은 중국에 합작사를 설립하고 진출했습니다. 초기 단계였던 중국시장의 잠재력을 보고 과감하게 뛰어들었죠. 그 덕분에 독일차는 중국시장 성장의 수혜를 톡톡히 누렸는데요. 수십 년이 지난 이젠, 그 합작투자가 부메랑이 돼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엄청난 양의 지식 이전이 이뤄진 겁니다. 그 결과 “중국 제조업체 차량은 기술과 품질 측면에서 비난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독일 언론의 평가까지 나오는데요.
독일 기업도 이를 알고 있습니다. BMW 대변인은 언론에 이렇게 말합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선 합작회사 설립이 의무였습니다. 특정 핵심 부품 개발도 마찬가지였고요. 물론 개발과 생산 노하우는 중국으로 흘러갔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전략적 실수였지만 이를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익명의 메르세데스 벤츠 관계자는 언론에 이렇게 털어놨습니다. “(중국으로의) 지식 이전은 어리석었습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독일 제조업체들은 스스로 무덤을 팠습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은 산으로 가고
독일 자동차는 하드웨어적으로 훌륭합니다. 뛰어난 주행성능과 제동 능력, 그리고 내구성까지 갖췄죠. 그런데 전기차 시대엔 ‘좋은 차’의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전기차는 기계적으로 아주 단순하거든요. 내연기관차는 움직이는 부품이 2000개인데, 테슬라 모델S는 18개뿐이죠. 전기차에서 기계적 정교함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배터리 성능, 그리고 소프트웨어 기술력입니다.
배터리 기술에 있어서 독일은 가진 게 없습니다. 이 부분은 중국(그리고 한국)과는 아예 상대가 되지 않으니 일단 넘어가고요.
그나마 애썼던 게 소프트웨어입니다. 폭스바겐 그룹은 기존 전기차 플랫폼(MEB)을 대체할 차세대 플랫폼(SSP)를 개발 중이죠. 기존 소프트웨어는 ‘재앙’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여러 문제점(교통 감지 시스템 결함으로 인한 급제동, 디스플레이 오류)을 노출시켰는데요. 새 소프트웨어 개발로 이를 돌파해 ‘레벨4’ 수준의 자율주행 기술까지 구현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를 이용한 새 전기차인 아우디 ‘아르테미스’를 2025년, 폭스바겐 ‘트리니티’를 2026년 출시한다고도 밝혔죠. 특히 트리니티 프로젝트는 폭스바겐 그룹을 구할 ‘게임체인저’가 될 거란 기대를 받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웬걸. 이 프로젝트가 최소 2년 이상 지연될 거란 사실이 지난해 말 알려졌습니다. 소프트웨어 자회사 카리아드(Cariad)가 그동안 예산만 초과 지출하고 개발은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리아드는 폭스바겐 그룹 내 흩어져있던 개발인력와 테슬라·IBM 출신 외부 인력까지 6000명을 한데 모아 2020년 설립한 회사입니다. ‘2025년까지 차량 소프트웨어의 60%를 직접 개발한다(현재는 약 10%)’는 야심찬 목표로 출범했는데요.
모아놓은 개발자들은 시너지를 내긴커녕 문화적 충돌만 일으켰습니다. ‘카리아드 문제 중 10%만 기술적 문제이고 90%는 문화적인 문제’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는데요. 결국 올해 5월 카리아드 CEO를 포함한 경영진 3명이 해고당합니다.
기계 중심의 독일 자동차 회사가 소프트웨어를 자체 개발하는 건 무리인 걸까요. 액센추어의 자동차사업부 책임자 악셀 슈미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드웨어 관점에서 그들(독일차 제조사)이 훌륭한 자동차를 만든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120년 된 자동차 브랜드가 소프트웨어에 필요한 복잡성과 품질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따라잡자, 차이나 스피드
“지붕이 불타고 있다.”
폭스바겐 브랜드 CEO인 토마스 셰퍼가 지난 7월 관리자 2000명과 진행한 내부 회의에서 한 발언입니다. 이후 독일 언론이 ‘자동차 산업 위기론’을 전할 때 꼭 넣는 단골 인용 문구가 됐는데요. 아주 급박한 위기 상황이란 경고입니다.
셰퍼 CEO가 그 회의에서 주문한 건 두가지입니다. 비용을 대폭 절감하고(향후 3년 동안 112억 달러 지출 절약), 더 빠르고 유연해져라(“우리 구조와 프로세스는 너무 복잡하고 느리며 유연성이 없다”).
전기차를 싸게 만드는 건 중국의 특장점이죠. 최근 UBS가 중국 제조업체 BYD(비야디)의 2022년형 씰(Seal)을 직접 분해해서 그 분석 결과를 담은 보고서를 냈는데요. 차량 부품의 75%가 BYD 자체 제작이었다고 하죠. 그 결과 BYD 씰이 테슬라 모델3과 비교해 15%, 폭스바겐 ID3 대비 30%의 비용 우위를 가지는 걸로 나타났습니다.
비용뿐 아니라 속도 면에서도 중국 기업은 압도적인데요. 맥킨지에 따르면 중국에서 전기차 새 모델을 개발해 출시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유럽(4년)의 절반인 2년에 불과합니다. 중국 브랜드가 매년 70여 종의 신형 전기차 모델을 내놓을 수 있는 이유이죠.
더 싸게, 더 빠르게. 중국이 만들어 놓은 이 기준을 따라가지 못하면 전기차 대중화 시대에 도태될 거란 위기의식이 커집니다. 폭스바겐 그룹의 올리버 블룸 CEO는 최근 열린 뮌헨 IAA에서 “중국은 우리에게 피트니스 센터가 되었다”고 표현했죠. 중국 전기차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차이나 스피드’에 맞춰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급 차량을 정교하게 만들어 비싸게 파는 데 익숙했던 독일차 기업엔 상당히 도전적 과제가 아닐 수 없죠.
물론 중국 전기차가 실제 독일차의 안방인 유럽까지 휩쓸게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겁니다. 유럽 전기차 시장에서 중국 브랜드 점유율은 8% 수준인데요. 최근 한 설문조사에서 독일인의 63%는 여전히 ‘중국 전기차 브랜드 구매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응답했습니다. 여전히 심리적 저항이 꽤 크죠.
어떻게든 전기차로의 전환 속도를 늦춰서, 정면승부를 미루려는 업계의 움직임도 나타납니다. 올리버 집세 BMW CEO는 EU의 ‘2035년 내연기관 신차 판매 금지’라는 목표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인물인데요. 그는 이번 IAA에서도 이 계획을 고수한다면 “(BMW 같은 프리미엄이 아닌) 기본 자동차 시장 부문은 사라지거나 유럽 제조업체에 의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독일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기후 정책 같은 비실용적인 정책에 대한 대중의 환멸이 커진 것과도 맥락이 통하죠. 독일에서만 200만 명 이상의 고용을 책임지는 자동차 산업의 미래가 달린 문제라서 그의 경고가 예사롭지 않게 들리긴 합니다. By.딥다이브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렇게 완전히 판이 뒤바뀔 때 전통 기업이 발빠르게 갈아타서 그 지위를 유지하기란 역시나 참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자동차 업계의 전통의 강자, 독일 자동차 산업이 위기론에 휩싸였습니다. 전기차로의 전환에서 한참 뒤지면서 중국 시장 점유율이 떨어지는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전기차 브랜드의 유럽 진출까지 본격화하면서 걱정은 더 커집니다.
-‘합작 투자의 부메랑’을 맞은 셈입니다. 중국에 자동차 개발, 제조 기술을 전수해 준 당사자가 바로 독일 자동차 기업이기 때문이죠.
-소프트웨어 분야의 약점도 노출됐습니다. 큰소리친 것과 달리 폭스바겐의 차세대 플랫폼 개발이 크게 지연되면서, 테슬라나 중국 브랜드와의 소프트웨어 격차는 더 벌어지게 됐습니다.
-고급차를 비싸게 파는 데 익숙한 독일차 업계는 더 싸게, 더 빠르게 전기차를 만들 수 있을까요. 예상보다 훨씬 빨리 코앞으로 다가온 전기차 대중화 시대. 독일 기업이 부랴부랴 속도를 올리고는 있지만 결과는 예측불가입니다.
*이 기사는 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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