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지난주 사무라이본드(엔화 표시 채권)를 발행했다는 뉴스 보셨나요. 이게 무려 25년 만의 일이라는데요. 특히 국내거주자(해외교포 포함)가 아닌 해외 투자자를 대상으로 사무라이본드를 발행한 건 역사상 최초라고 합니다. 사실상 한국 정부가 일본 사무라이본드 시장에 데뷔한 셈이죠.
그런데 한국 정부만이 아닙니다. 워런 버핏의 버크셔해서웨이와 인도네시아·필리핀 정부까지. 올해 들어 사무라이본드 발행이 줄 잇고 있는데요. 왜 지금 시점에 다들 엔화로 돈을 빌리려는 걸까요. 당연히 금리도, 통화가치도 저렴한 엔화로 돈 빌리기 좋은 시기이기 때문이겠죠. 그럼 엔화 가치가 다시 뛸 수도 있다는데, 혹시 리스크는 없을까요. 오늘은 사무라이본드와 엔화 환율 전망을 딥다이브 해보겠습니다.
기획재정부가 7일 700억 엔(약 5억 달러) 규모의 엔화 표시 외평채를 발행했습니다. 3년, 5년, 7년, 10년 만기로 나눠 채권을 찍었는데요. 평균 발행금리(가중평균 기준) 0.70%, 3년 만기짜리 금리가 0.475%였습니다. 일본에서 최근 발행된 모든 사무라이본드 중 최저 금리였죠. 하긴, 대한민국 국가 신용등급은 무려 AA등급(S&P 기준). 일본(A+)보다도 두단계나 높다고요.
그럼 흥행은? 그야말로 인기 폭발. 주관사 중 한 곳이었던 일본 현지 투자회사 담당자 A씨(익명을 요청함)와 11일 국제전화로 통화했는데요. 분위기를 이렇게 전합니다. “대형 기관투자자뿐 아니라 보수적인 지방 금융기관까지 엄청 활발하게 참여했습니다. 상상도 못 할 금액(의 주문)이 들어왔어요.”
낯선 데 투자하기 꺼리는 일본 투자자들이 처음 보는 한국 외평채를 덥석 사들였다니, 좀 의외인데요. 다 이유가 있더군요. A씨는 “기재부가 로드쇼(투자설명회)에서 한국의 정부부채 비율(GDP 대비 48.7%)이 일본(GDP 대비 263.9%)보다 훨씬 낮은데도 ‘건전 재정’ 정책을 펼친다고 하자 일본 투자자들이 놀랐다”고 전합니다. 또 “신용등급이 높고, 일본 국채·지방채처럼 무위험의 투자자산이라는 점도 투자가 몰린 이유”라고 하죠. 한마디로 일본 국채 못지않게 믿고 투자할 안전자산이라 여겨 인기를 끈 겁니다.
엔화로 돈 빌리면 뭐가 좋길래
그럼 한국 정부는 왜 이 시점에 사무라이본드를 발행했을까요. 정치외교적 해석(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이 당연히 나오는데요. 여기선 경제 논리만 따져보겠습니다.
가장 큰 건 역시 금리이죠. 기획재정부는 보도자료에서 “전 세계적인 고금리 상황에서 금리가 낮은 엔화 표시로 외평채를 발행하여, 외화보유액 조달 비용을 절감했다”고 밝혔는데요. 지난 4월 워런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가 1600억 엔, 7월 프랑스 금융회사 BPCE가 1977억 엔어치 사무라이본드를 발행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전 세계에 남은 유일 마이너스 금리 국가(일본 기준금리 –0.10%)라는 이점이 확실한 겁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올해 사무라이본드 발행액은 8452억 엔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0% 가까이 증가했죠.
마침 지금이 역대급 엔저(엔화 가치 하락)라는 점도 비교적 긍정적입니다. 사무라이본드로 끌어모은 엔화를 정부는 어떻게 쓸까요. 모두 한국으로 들여오지만, 환전은 하지 않고 엔화로 운용한다고 합니다. 외화보유액에 속하는 엔화 자산이 되는 거죠. 만약 중간에 엔화 가치가 오른다면? 달러로 환산한 외화보유액 가치가 올라가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 만기 때 엔화 가치가 엄청 뛴다면? 이 역시 갖고 있던 엔화로 갚으면 되니까 별로 손해 볼 일은 없습니다.
기재부 관계자는 “빌려온 엔화를 원화로 환전해서 운용하다 나중에 다시 엔화로 환전해서 갚아서 환차손이 생기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죠. 쭉 엔화로 운용할 거기 때문에, 2008년 국내 중소기업과 병·의원들을 떨게 했던 ‘엔화 대출 폭탄’ 같은 일은 없을 거란 뜻입니다. 그 당시엔 너도나도 엔화로 빌린 돈을 원화로 환전해서 썼기 때문에 엔화 가치 급등기(100엔당 800원대→1500원대)에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던 거죠.
금리와 환율 타이밍이 좋은 건 알겠는데, 엔화 자금이 지금 그렇게 필요한가라는 의문은 남습니다. 외화자금 시장에서 엔화를 구하기 어려워 동동거릴 일이 생길 정도로 국내 기업의 수요가 많은 건 아니니까요. 이에 대해 기재부 측은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앞으로 우리 기업들이 일본과 비즈니스 할 일이 점점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의미를 설명합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으로 반도체나 2차전지 같은 분야에서 한국과 일본 기업 간 협력이 늘어나지 않겠냐는 (아직은 막연한) 기대인데요. 이에 대비해 정부가 미리 길을 닦아놨다는 설명입니다. “만약 한국 기업이 앞으로 일본에서 엔화 표시 채권을 발행한다면 이번 외평채 금리가 기준점(벤치마크)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지금도 간간히 사무라이본드를 발행하는 한국 기업이 있습니다. 대한항공의 경우 지난 6월에 3년 만기 채권 200억엔어치를 금리 0.76%로 발행했죠. 수출입은행 보증을 받은 덕분에 금리를 그래도 좀 낮출 수 있었다는데요. 일본 투자업계 A씨는 “이제 사무라이본드 시장에선 외평채 금리가 기준점이 된다”면서 “만약 대한항공이 지금(외평채 발행 이후) 발행한다면 6월보다 금리를 적어도 10bp(=0.1%포인트) 정도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달러당 146엔… 엔저는 이제 끝물일까
제로금리·엔저인데다 한국 정부까지 나서서 판을 깔아줬으니, 그럼 기업들이 사무라이본드 발행을 늘리기 좋은 시점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이냐 아니냐에 따라 다르죠. 앞에서도 언급했던 환율 문제 때문인데요.
일본에서 사업이나 투자를 하는 기업이라면 환율을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버크셔 해서웨이가 사무라이본드를 대량 발행한 것도 그걸로 일본 주식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낮은 금리로 엔화를 빌려 일본 주식에 투자하면 일석이조입니다. 일단 이자가 싸서 좋고, 나중에 엔화 가치가 급등하더라도 주식 팔아서 빚 갚고 남는 수익에 대해 환차익까지 노릴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빌린 엔화를 원화나 달러화로 환전해서 쓰려는 경우라면 생각을 다시 해봐야 합니다. 지금 엔화 환율이 달러당 146엔대. 과연 이 역대급 엔저가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엔화 가치가 바닥인 건 기준금리를 무지막지하게 올린 다른 나라와 달리 일본은 여전히 마이너스 금리(단기금리 –0.10%)를 고수하고 있어서입니다. 결국 다른 나라, 특히 미국 연준이 금리를 좀 내리거나, 아니면 일본은행이 통화 긴축으로 돌아서거나. 둘 중 하나이면 엔화 가치가 다시 뛸 수 있을 텐데요.
이와 관련해 지난 주말 놀라운 소식이 나왔습니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요미우리신문과 단독 인터뷰를 했는데요. 거기서 “마이너스 금리 해제 이후에도 물가 목표(인플레이션 2%) 달성이 가능하다고 판단하면 (해제를) 할 것”이라고 발언했습니다. 게다가 그 판단 시기를 묻자 “연말까지 충분한 정보나 데이터를 갖출 가능성은 제로가 아니다”라고 말했죠. 완곡한 그의 발언을 좀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르면 연말에 기준금리 인상에 나설 수도 있다’가 됩니다.
이건 놀랍다 못해, 귀를 의심할 정도로 센 발언인데요. 올해 4월 취임 이후 내내 비둘기파적 발언(“끈질기게 금융완화”)만 내놓던 그가 느닷없이 매파적으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일본은행은 장기국채 시장금리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뛰면 국채를 ‘무제한으로 매입’해서 금리를 끌어내리는 YCC(수익률곡선제어:Yield Curve Control) 정책도 아직 없애지 않았거든요(단, 10년물 국채금리 용인 상한선을 지난 7월에 0.5%에서 1.0%로 올림). 그런데 그보다 한단계 더 나아간 ‘기준금리 인상’을 벌써 총재가 입에 올리다니. 너무 진도가 빠르죠.
일본의 통화정책 대전환이 드디어 시작된 걸까요. 아니면 지난주 엔화 가치가 너무 떨어지자 총재가 평소보다 발언 수위를 일부러 높인 걸까요. 아직은 의견이 분분한데요. 일단 시장은 잔뜩 긴장했습니다. 지난주 힘없이 떨어졌던 엔화 가치가 이 발언 이후 바로 반등했으니까요. 11일 오후 도쿄 외환시장에선 지난주 후반 달러당 148엔에 육박했던 엔화 가치가 한때 달러당 145엔대까지 올라섰습니다(환율은 하락).
앞으로는 어떨까요. 외환시장 전문가인 권아민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에게 11일 전화로 물어봤는데요. 그는 “우에다 총재가 직접 (금리 인상을) 말한 건 유의미한 변화”라며 “일본은행의 방향성은 분명히 긴축”이라고 말합니다. 다만 신중한 일본은행답게 그 속도는 느릴 걸로 내다봤는데요. 그는 “겨울의 수입 물가 동향을 체크한 뒤 내년쯤 의미 있는 변화, 예를 들어 YCC 상한선을 지금(1.0%)보다 더 올리는 식이 될 것”이라며 “금리 인상까지는 내년에도 좀 무리일 것 같다”고 설명합니다. 금리 인상은 없겠지만 일본은행이 국채 무제한 매입 정책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내년엔 완만한 ‘엔고’로 갈 거란 전망이죠.
‘미스터 엔’으로 불리는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전 대장성 차관 역시 ‘엔고’를 외칩니다. 그는 지난달 니혼게이자이신문 인터뷰에서 “연말엔 1달러=130엔 전후까지 (엔화 가치가) 상승할 수 있다”며 “당분간 완만한 엔고로 갈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그는 “(제조업의) 국제화가 잘 진행되고 있어서 이제 엔고가 일본 기업에 플러스”라는 일본 경제 낙관론도 함께 펼쳤습니다.
사실 ‘내년엔 엔고’라는 얘기는 지난해에도 있었죠. 바닥이라고 보고 일찌감치 엔화 줍줍했다가 물려있는 국내 투자자들도 상당합니다. 다만 1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미국의 금리인상이 끝나간다는 전망까지 맞물리면서 엔화 강세 전환론이 좀더 힘을 얻는 분위기인데요. 엔화자산을 사려는 투자자이든 엔화로 돈을 빌리려는 채무자이든, 일본의 통화정책과 환율 변화에 예민해질 때입니다. By.딥다이브
금리·채권·환율·통화정책. 기사로 쓸 때마다 참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주제로구나 싶긴 한데요(특히 환율이 내려가면 통화가치가 올라가는 것 때문에 더 헷갈림). 내 자산가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인 건 분명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한국 정부가 사무라이본드 700억엔어치를 발행했습니다. 보수적인 일본 투자자들이 대거 몰리면서 상당한 인기를 모았다고 합니다. 일본 국채 못지 않게 안전한 자산인데다, 한국의 낮은 정부 부채 비율이 특히 매력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초저금리를 기회로 삼아, 버크셔 해서웨이 같은 기업은 물론 각 국 정부까지 엔화표시 채권 발행을 올해 들어 크게 늘리는 추세입니다. 엔화로 빌린 돈을 가지고 일본에서 사업이나 투자를 하는 경우라면 지금은 좋은 기회입니다.
-하지만 환율 위험에 노출된 경우엔 지금 시점에 엔화로 돈을 빌리는 건 자칫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행 총재가 ‘금리 인상’ 가능성까지 언급하면서 통화정책 방향 전환 의지를 보이고 있는 시점입니다. ‘완만한 엔고’로 갈 거란 전망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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