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균으로부터 맥주 맛을 지켜라 [브랜더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9월 15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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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더쿠’는 한 가지 분야에 몰입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가장 깊게 빠진 영역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브랜더쿠에서 수제맥주 덕후들을 위한 시리즈 <수제맥주의 비하인드 씬>을 준비했어요. 필자는 국내 최초 논알콜 수제맥주 전문 양조장 '부족한녀석들'을 설립한 황지혜 대표입니다. 수제맥주 한 캔에 얽힌 이면의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이번 편에서는 양조장 청결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오늘도 세균에 맞서 맥주 맛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황 대표의 이야기를 만나보시죠.
예능 프로그램에서 의사가 등장하는 상황극에 어김없이 깔리는 메디컬 드라마 ‘하얀거탑’의 배경음악. 이 BGM만 들으면 장갑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손을 한껏 치켜올리고 수술실로 입장하는 의사가 떠오른다. 단 한 톨의 바이러스 유입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결연하다.

작업장에 들어서는 양조사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 박테리아와 세균이 나의 맥주를 공격하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각오로 위생복, 위생모, 라텍스 장갑, 마스크까지 완전 무장한다. 의사와 다른 점은 손에 매스 대신 (섭취해도 문제가 없는) 소독제 스프레이를 들었다는 것. 소독제 스프레이는 양조사에게 생명수와도 같다. 맥주 탱크의 수도꼭지인 샘플콕과 맥주를 담는 원통형 용기 케그, 탱크와 케그를 연결하는 커플러, 캔입 설비, 심지어 양조사의 장갑을 낀 손에도 수시로 스프레이를 분사해야 한다. 오죽하면 소독제 스프레이가 시야에 없을 때 초조해할 정도다.

청소로 지켜야 하는 맥주 맛
“양조장 업무의 90%는 청소, 10%는 서류작업이다.” 과거 미국의 어느 맥주 전문가의 이 발언을 읽었을 때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양조장의 주 업무는 맛있고 창의적인 맥주를 만드는 것이지 어떻게 청소란 말인가. 하지만 양조장을 시작하고 나서 100% 공감하게 됐다.

맥주의 제조 과정은 깨지기 쉬운 구슬과 같다. 한 가지 공정만 엇나가도 와장창 모든 것이 망가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 망가짐의 결과는 맥주 맛이 없어지는 수준이 아니다. 먹을 수 없는 맥주, 맥주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액체가 완성된다. 이런 망가짐의 주요 원인은 오염. 맥주는 다른 주류에 비해 오염에 취약하다. 상대적으로 pH(수소이온지수)가 높아 미생물이 번식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해서다. 그만큼 오랫동안 세균과 박테리아의 공격을 견뎌야 맥주로 거듭나기 때문에 에일은 2주, 라거는 4주까지 양조 기간이 걸린다.

양조장 바닥 세척과정_출처 : 황지혜 부족한녀석들 대표

맥주의 양조 과정 중 자비(끓임) 이후에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 중의 온갖 위험요소가 맥주의 주재료인 맥즙을 호시탐탐 노리기 때문이다. 첫 번째 경계대상은 야생효모. 일반적으로 맥주에는 해당 맥주 스타일에 특화시킨 효모를 첨가하는데, 공기 중에 떠다니는 야생효모가 맥즙을 발효시키면 그 맛을 예측할 수가 없다. 대기 중의 젖산균과 초산균의 위협도 만만치 않다. 이 2가지 균이 맥즙에 더해지면 맥주가 혼탁해지고 신맛이 난다. 따라서 애초에 신맛을 내야 하는 사워비어(Sour beer)의 양조시설은 다른 브루어리와 분리하는 것이 원칙이다. 사워비어를 발효시키는 균이 다른 탱크로 퍼지면 일반 맥주가 식초로 변질되는 아찔한 사고가 발생해서다. 맥주가 배관을 타고 탱크를 옮겨 다니는 맥주 양조과정의 특성상 탱크의 위생도 매우 중요하다. 1개 탱크만 오염돼도 다른 탱크까지 연쇄적으로 오염돼 양조장 전체가 혼돈에 빠질 수 있다.

논알콜 맥주를 제조할 땐 더욱 엄격한 청결관리가 요구된다. 논알콜 맥주는 도수가 거의 없기 때문에 알코올을 함유한 일반 맥주에 비해 오염될 소지가 많다. 양조장에서 일반 맥주와 논알콜 맥주를 함께 제조한다면 더욱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맥주의 완성도를 높이려면 여러 청소도구로 맥주 탱크와 샘플콕 등 각 부품을 꼼꼼히 세척해야 한다_출처 : 황지혜 부족한녀석들 대표


양조사의 자격요건은 결벽증?
브루어리의 오염 사고를 막는 방법은 오로지 철저한 위생관리뿐이다. 양조장에서는 가능한 모든 것을 세척하고 소독한다. 탱크와 배관, 캔입 장비 등은 기본 골격만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최대한 분해해서 닦는다. 각 양조시설에 따라 세척 및 소독 주기에 맞춰 적합한 약품으로 세척해야 한다. 손이 닿지 않는 탱크 및 배관의 내부를 청소할 땐 펌프로 물, 열, 세제 등을 순환시켜 청소하는 CIP(Clean In Place) 시스템의 힘을 빌린다.

양조장에서 양조나 캔입 작업을 마치고 홀가분하게 바로 퇴근하는 일은 없다. 즉시 청소와 세척 작업이 이뤄지지 않으면 보물 같은 장비들이 세균과 박테리아에게 공격당하고 만다. 맥주의 당 성분이 굳어버리면 장비 고장의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도 재빠른 청소가 필요하다. 곰팡이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장비를 꼼꼼하게 말리는 과정도 필수다.

CIP 머신(좌측 원 표시된 부분)을 탱크에 연결한 후, CIP의 펌프를 작동시키면 탱크 내부를 세척할 수 있다_출처 : 황지혜 부족한녀석들 대표


맥주를 마실 때도 필요한 결벽증
양조장 청소로 땀을 흠뻑 흘린 하루. 시원한 생맥주 한 잔이 간절하다. 그렇다고 아무 맥줏집이나 갈 수는 없다. 자칫 청결관리에 소홀한 펍에 가면 박테리아나 야생효모에 감염돼 버터맛, 신맛이 나는 맥주를 대면할 것이다. 맥주가 양조장에서 완벽한 품질로 출고된다해도 펍에서 변질되는 것은 한 순간이다. 양조장에서 케그에 담겨 펍까지 온 맥주는 생맥주 시스템(Draught System)을 거쳐 서빙된다. 이때 케그로부터 맥주가 나오는 탭(수도꼭지)이 제대로 청소돼 있지 않으면 맥주는 온갖 불쾌한 풍미를 발산한다. 잔에 담긴 맥주의 색깔이 탁하거나 거품이 과하게 적거나 많을수도 있다. 탭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페디오코커스와 락토바실러스처럼 이름만 들어도 불쾌한 세균들이 관과 꼭지 사이에 번식하기도 한다. 맛도 맛이지만 건강에도 좋을 리 만무하다.

생맥주 시스템 관리가 미흡한 펍에서는 맥주의 매력을 100% 즐길 수 없다_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양조장과 마찬가지로 펍에서도 맥주 맛을 지키는 데 다른 방법은 없다. 매주 생맥주 시스템을 최대한 분해해서 닦고 재조립하는 것이 해결책이다. 잔의 위생상태 역시 맥주 맛에 영향을 끼치므로 깨끗이 닦고 꼼꼼하게 말려야 한다.

결론은 청소에 진심을 다해야 맥주를 잘 만들고 온전히 즐길 수 있다. 양조장과 펍을 운영하려면 다소의 결벽증이 필요하단 뜻이다. 이런 결벽증에 맥주의 주질을 높이고 제대로 서빙하겠다는 단단한 철학이 깔려야만 남다른 브루어리와 펍을 만들 수 있다.

#브랜더쿠#수제맥주#브루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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