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 등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려는 총성 없는 전쟁에 유럽도 ‘칩스법’을 통해 본격 가세했다. 대만 TSMC와 미국 인텔 등 반도체 주요 기업들이 유럽에 둥지를 틀면서 글로벌 공급망 지도에 변화가 감지된다. 자국 내 반도체 생산을 늘리기 위한 해외 각국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흐름 속에서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들의 향후 투자 계획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1일(현지시간) 2030년까지 민간과 공공에서 430억 유로를 투입해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20%까지 끌어올린다는 내용의 신규 반도체법을 발효했다고 발표했다. 연구개발(R&D)에 집중된 EU의 반도체 생태계를 바꿔 역내 제조 역량을 확대하고, 이를 통해 역외 수입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방침이다.
유럽은 전 세계 반도체의 20%를 소비하며 미국, 중국에 이어 3대 시장으로 꼽히지만 생산능력은 10%대에 불과해 대외 의존도가 높다. 하지만 영국 ARM,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 반도체 설계 부문 강자들과 세계 유일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네덜란드 ASML이 유럽에 있다. 또 독일 완성차 3사가 고객사로 있는 만큼 차량 반도체 생산 기반도 탄탄하게 구축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미 글로벌 반도체 기업 중 유럽을 거점으로 삼아 투자를 계획한 곳도 적지 않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부활을 노리는 미국 인텔은 독일 마그데부르크에 170억 유로를 투자해 공장을 짓고, 기존 아일랜드 공장에도 45억 유로를 투자해 규모를 2배로 확대할 계획이다. 지난 6월 인텔은 폴란드 브로츠와프 인근에 46억 달러 규모 신규 반도체 공장을 짓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대만 TSMC도 독일 드레스덴에 공장을 지을 계획이며 독일 정부와 투자 규모 등에 대해 협상을 벌이고 있다. 추정되는 투자 규모만 100억 유로에 달한다. 업계 관계자는 “유럽은 역내에 반도체 생태계의 ‘마지막 퍼즐’인 첨단 반도체 생산 시설을 구축하겠다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며 “유럽이 상대적으로 지정학적 리스크가 적은 것은 장점”이라고 말했다.
EU는 유럽판 ‘칩스법’을 통해 파운드리 강자인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 등에도 러브콜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입장을 내놓진 않고 있다. 업계에서는 공장 건설 등 유럽 현지 진출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유럽이 설비, 인력 수준은 높은 편이지만 공장 건설 비용이 적지 않아 거점을 삼기엔 적합하지 못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계현 삼성전자 반도체(DS)부문장(사장)도 올해 들어 이스라엘 텔아비브, 독일 뮌헨과 슈투트가르트, 스위스 제네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 유럽 지역을 찾아 현지 사업 현황을 점검했지만 아직 반도체 공장 설립 계획을 밝힌 바 없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에서도 반도체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고 유럽에 첨단 공정을 활용할 만한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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